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아주 힘든 고백을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환영이 아닌 조롱과 모욕이었습니다.”(예레 20,7-8 참조) 그는 이제 더 이상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침묵하려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하느님의 뜻은 언제나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대로 오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길과 주님이 이끄시는 길이 다를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단지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에 머물지 않습니다. 참 신앙은 “내 생각보다 하느님의 생각을 선택할 수 있는가?”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예언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받은 말씀을 시대 앞에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언제나 환영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인은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말인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뒤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말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인간적으로 보면 이처럼 아름다운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놀라울 정도로 강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마태 16,23) 베드로는 고난받는 메시아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메시아,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베드로의 인간적인 애정이 하느님의 뜻보다 앞선 것입니다. 이 지점이 한국교회가 넘어야 할 커다란 현실적인 유혹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 오히려 예수님의 사명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교훈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고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자녀가 가야 할 길을 대신 정해 주기도 합니다. 자녀 역시 부모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원하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정말 하느님의 뜻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기 생각을 교회의 뜻처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다”면서 실제로는 내가 원하는 주님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여라.”(마태 16,23 참조)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아주 정확한 해답을 줍니다.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여기에서 핵심 단어는 분별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무조건적인 복종이나 감정적인 열심만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를 요구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필로칼리아」(사막 교부들의 내적 고요 생활 발췌 글)의 ‘마음지킴(깨어있음)’이 우리를 도와줍니다. 마음에는 끊임없이 생각이 들어옵니다. 문제는 그 생각에 동의해 버리는 것입니다. 생각이 떠오르는 것과 그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분노와 욕심이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와 내가 하나가 되거나, 욕심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의 자유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마음지킴은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세상의 생각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그 생각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지킴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내 뜻을 내려놓는 자리’입니다. 내 뜻을 하느님의 뜻 안에 봉헌하는 것입니다. “주님, 이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듣게 해주십시오. 마음을 고요하게 해주세요.” 그때 조금씩 알게 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은 때로 어려워도 사람을 사랑하고, 진실하며, 겸손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