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현대사에서 ‘정의(justitia)’라는 단어는 가장 오염된 동시에 가장 애타게 추구된 가치였다. 1980년 5·18 민주항쟁을 유혈 탄압하며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 세력은 역설적이게도 국정 슬로건으로 ‘정의 사회 구현’을 내걸었다.
그러나 그 화려한 구호 아래서 자행된 삼청교육대, 녹화사업 등의 무자비한 인권 유린은 위정자가 내세운 정의가 얼마나 기만적일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국가 권력이 오히려 정의의 근간인 인간의 존엄을 짓밟은 이 역설은 우리 역사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당시 하느님의 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강론을 통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아모 5,24)고 외쳤다. 권력자가 부당한 통치의 정당화를 위해 내세운 정의가 ‘박제된 명분’이었다면, 김 추기경이 제시한 정의는 억눌린 자들의 몫을 되찾고 보편적 가치를 회복하는 ‘생동하는 질서’였다.
이러한 역사적 모순은 우리에게 정의의 본질에 대해 묻게 만든다. 국가 권력을 장악한 지배자가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강제하는 통치가 정의인가, 아니면 인간의 천부적 권리와 공동체의 참된 복리를 위한 저항이 정의인가? 우리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의론을 통해 이 비극적 모순을 해명할 진정한 정의의 기준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독재 권력자가 내세웠던 ‘정의’, 인간 존엄 짓밟고 큰 상처 남겨
정의의 본질은 타인 향한 존중… 보편적 공동선 가치 지향해야
사회의 도덕적 건강성 회복하고 진정한 화해·행복 이룰 수 있어
‘각자에게 그의 몫을 돌려주는 항구한 의지’로서의 정의
토마스의 철학 체계에서 정의는 단순한 개인적 덕성을 넘어, 법치주의의 인격적 토대이자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원리로 작용한다. 「신학대전」에서 토마스는 정의를 현명, 용기, 절제와 함께 사추덕의 하나로 분류하면서도, 그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위상을 부여한다.(II-II,58,12) 이는 정의가 개인의 내면적 수양에 머물지 않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공동선(bonum commune)’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정의를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데 있어서 완전하고 항구한 의지”라고 정의(定義)한다.(II-II,58,1) 이 고전적 정의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은 정의의 주체가 지성이 아닌 ‘의지’라는 사실이다. 정의는 단순히 무엇이 옳은지 인식하는 지적 활동에 그치지 않고, 타인에게 마땅한 권리를 부여하겠다는 견고한 습성을 의미한다. 특히 토마스는 감각적 욕구는 비유하거나 비교할 줄 모르기 때문에 정의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II-II,58,4) 즉, 정의는 고도의 지성적 숙고를 전제한 의지적 결단이자 인격적 습성인 것이다.
윤리적 위상의 측면에서 정의는 다른 덕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 절제나 용기가 개인의 내적 정념을 다스린다면, 정의는 철저히 ‘타인과의 관계(ad alterum)’를 본질로 하며 ‘외적 행위’를 대상으로 삼는다.(II-II,58,11) 토마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의를 ‘은유적인 정의’로 한정함으로써, 정의의 본질이 타자에 대한 존중과 사회적 적절성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II-II,58,2)
더 나아가 토마스는 정의를 ‘개별적 선(bonum singularis)’이 아닌 공동선을 향하는 ‘웅장한 덕’으로 평가한다. 정의는 모든 덕의 행위를 공동체의 이익으로 인도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법적 정의(justitia legalis)’와 동일시된다. 이러한 정의의 본질적 규정은 법이라는 객관적 기준을 통해 사회 질서 속에서 구체화된다. 정의의 주체가 타인을 향한 올바른 의지임을 확인했다면, 이제 이 의지가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그 형태들을 고찰해 보자.
정의의 다양한 형태와 참사랑의 관계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계승하고 심화하여 정의를 ‘일반적(법적) 정의’와 ‘특수 정의’로 명확히 구분하고, 특수 정의를 다시 ‘교환 정의’와 ‘분배 정의’로 세분화한다
첫째, ‘교환 정의(justitia commutativa)’는 사적인 개인들 사이의 상호 거래와 계약을 규제하는 정의다. 이는 ‘준 만큼 받고 받은 만큼 되돌려주는’ 철저한 ‘산술적 평등(수학적 동등성)’을 원칙으로 삼는다.(II-II,61,2) 예를 들어 소유권을 보호하고, 계약상의 의무를 이행하며, 채무를 변제하고, 남에게 입힌 손해를 똑같은 가치로 배상(restitutio)하는 활동들이 모두 교환 정의의 영역에 속한다.
둘째, ‘분배 정의(justitia distributiva)’는 공동체(국가)가 개별 구성원들에게 공공의 재화, 관직, 명예, 영예를 분배하는 방식을 규율하는 정의다. 분배 정의는 절대적인 양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산술적 평등이 아니라, 각 개인의 기여도와 공동체 안에서의 위치에 따라 상대적으로 다르게 배분하는 ‘비례적 평등(기하학적 비례)’을 원칙으로 한다. 즉, 공동체에 더 크게 공헌한 자에게 더 많은 몫이 돌아가는 것이 비례에 의한 동등성이다.(II-II,61,2&4) 공동체의 지도자는 구성원들 하나하나의 필요와 공헌도를 고려하면서 화합과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분배 정의를 현명하게 실행해야 한다.
이러한 구분을 토대로 성찰해 보면, 5·18 민주항쟁의 희생자들에게 진실 규명과 명예 회복이라는 몫을 돌려주는 것은 단순한 시혜적 보상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 내에서 그들이 수행한 가치에 부합하는 정당한 몫을 배분함으로써 뒤틀린 사회적 비례를 바로잡는 분배 정의의 실현이다.
더 나아가 토마스에게 정의는 인간 사회의 기초가 되는 평등과 권리를 수호하는 동시에, 인간의 근원적 한계를 인정하며 보다 높은 차원의 덕인 종교와 참사랑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한다.(II-II,80,1) 오늘날의 윤리적 실천에 비추어 볼 때, 토마스의 통찰은 정의가 차가운 법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 인격의 존엄성에 기초한 ‘사랑 안에서 완성되는 정의’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그러므로 5·18 민주항쟁은 훼손된 정의의 습성을 회복하려는 공동체의 거대한 의지적 분출이었다. 당시 국가가 자행한 불법적 학살은 타인의 생명과 존엄이라는 ‘각자의 몫’을 찬탈한 명백한 불의(不義)이며, 이는 영혼의 생명인 참사랑을 거스르는 중대한 죄다.(II-II,59,4)
오늘날 우리가 5·18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과정은 파괴된 산술적, 기하학적 평등을 다시 세우는 배상의 절차이다. 정의가 배제된 채 급조된 화해와 평화는 기만적인 거짓으로 전락하기 쉽다. 정의의 요구에 철저히 응답함으로써 공동체의 도덕적 건강성을 회복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꼭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