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순교자들이 피로 증거한 신앙의 모범을 본받아,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로 특별히 더 결심하는 날이지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라는 오늘 복음 말씀은 자신의 목숨마저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순교자들의 고귀한 정신을 더욱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이 구절은 공관복음이 모두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신을 버리고”에서 ‘버리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그리스어는 ‘아르네오마이(ἀρνέομαι)’입니다. ‘거절하다’, ‘거부하다’ 또는 ‘부정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지요. “믿음으로써,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 파라오 딸의 아들이라고 불리기를 거부하였습니다”(히브 11,24)라는 구절에 사용됩니다. 또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마태 26,70)라고 할 때도 쓰이지요.
모두 어떤 주장이나 사실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고 인정할 수 없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수용하지 않겠다는 거지요. 여기서 ‘버리다(아르네오마이)’는 물건이나 쓰레기 따위를 내다 ‘버린다’고 할 때처럼 물질적 차원에서 소유를 포기하는 버림이 아니라, 내적인 차원에서 결코 내 안으로 들이지 않겠다는 결연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르네오마이는 단지 부정이나 거부 의사만 표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아예 관계의 단절까지도 나아갑니다.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만들어 완전히 인연을 끊어 버리는 거지요. 이때는 그냥 버리다가 아닌 ‘저버리다’라고 번역합니다.
“그는 믿음을 저버린 자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쁩니다.”(1티모 5,8), “너는 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묵시 2,13)
이 ‘저버림’은 존재론적으로 버린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 상대의 의견이나 주장에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와 맺어왔던 관계 자체를 끊어 버리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복음서가 표현한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는 것, 나라는 존재 자체에서 아예 ‘벗어난다’라는 뜻입니다. 즉, 옛것을 ‘버리고’ 옛 악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는 것이지요. 자신을 버린다는 건 껍데기를 벗고 나비가 되는 존재의 근원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을 따르려면,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와 회심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가진 많은 소유 중에서 어느 정도만 덜어내는 ‘선택적 버림’으로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적당히 버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지요. 온전히 비워내지 못하는 건 양다리를 걸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1열왕 18,2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버림’이란, 그냥 버림이 아니라 완전히 ‘끊어 버림’입니다. 남김없이 비워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완전하게 끊어 버림은 단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버리고, 또 버려야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버려도, 또 버릴 것이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자신을 버리는 일은 결코 일생에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공관복음 중에서 루카복음에만 유일하게 삽입된 단어가 있으니, 바로 “날마다”(루카 9,23)입니다.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에는 ‘날마다’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루카복음은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겹게 노력해야 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만 내 고집을 꺾는다거나 이런 조건에서만 내 뜻을 접는다거나 하는 것으로는 진정으로 자신을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든 ‘날마다’ 그래야 합니다. 어제 버린 나를 오늘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나를 내일도 버릴 수 있어야 하지요.
자신을 버리는 것은 날마다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자신을 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날마다, 자신을 처음 버리는 것처럼, 그러나 마지막으로 버리는 것처럼 그분을 따르십시오.

글 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