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배신의 쓰라림과 고통 앞에서 삶은 과연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삶의 결정적 질문과 한계상황(죽음, 고통, 전쟁, 책임 등) 앞에서 인간의 객관적 지식은 끝나고, 각자는 자기 나름의 선택과 믿음을 마주한다.
한 과부의 외아들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과부는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면서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사고 현장에서 울부짖던 그녀는 병원에서 아들의 시신을 껴안고 피맺힌 슬픔의 눈물을 쏟아낸다. 이토록 슬퍼하는 과부에게 객관적인 지식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낼 수도, 서럽게 우는 과부의 눈물을 닦아줄 수도 없다. 의사 역시 외아들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외아들의 장례를 마치고 모두가 돌아갔을 때, 휑한 가슴으로 과부는 묻는다. “왜 삶은 이다지도 슬픈가?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가?”, “이 쓰라린 고통을 왜 내가 당해야 하는가? 하느님을 잘 믿지 않아서인가?”, “나도 언젠가는 죽겠지만, 대체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정말 하느님은 계신 것일까?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고통을 나에게 허락하시는가?”
과부는 인생의 이러한 결정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이 질문들 속에서 인간은 나름대로 삶과 하느님에 대한 통찰을 지니며 어떤 형태로든 믿음을 갖게 된다. “삶은 육체의 죽음으로 끝난다”고 믿든, 아니면 “내세와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믿든 믿게 된다. 또한 “하느님이 계시다”고 믿든,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믿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믿음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신앙은, 삶이란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인간의 고통은 절대로 무의미하게 끝나지 않는다고 확언한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에 자신을 일치시키며 그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할 때, 그 고통이 구원의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더 나아가 신앙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의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된다”고 선포한다. 이 메시지가 과부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 진리를 믿음으로써 과부는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는다.
결국 신앙은 한계상황 속에서 터져 나오는 인생의 결정적인 질문과 체험 앞에서 마주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행위이며, 살아서나 죽어서나 인간을 구원하는 길이다. 객관적인 지식은 고통과 죽음 앞에서 무력하지만, 신앙은 고통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의 삶과 이 세상 안의 새로운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지식은 인간이 마주하는 삶의 한계상황과 고통의 심연 앞에서 유한함의 마침표를 찍는다. 지식이 멈춘 그 자리에서 비로소 인간은 삶의 참된 의미를 묻기 시작하며, 이성(理性)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앙의 영역으로 발을 내디딘다. 결국 지식이 끝나는 그곳이 하느님의 구원 은총과 인간의 진정한 믿음이 시작되는 자리가 된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