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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역사 지킨 평신도들] (3) 실천하다: 남상철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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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순교자 성월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순교자들을 특별히 공경하고, 그들의 삶과 신앙을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들이 그 정신을 본받는 시기다. 순교자의 신앙을 이어받아 평생 실천한 대표적인 평신도가 있다. 남종삼(요한, 1817~1866) 성인의 손자인 고(故) 남상철(프란치스코, 1891~1978) 프란치스코회 제3회 서울형제회 전 회장이다.

■ 기구한 인생을 지탱한 순교자 신앙

남상철 회장은 순교자인 남상교(아우구스티노, 1784~1866)의 증손자이자 남종삼 성인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의 삶에는 늘 ‘순교자의 후예’라는 이름이 따라다녔다. 이는 크나큰 영광이었지만 동시에 신앙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무게이기도 했다.

그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 남규희(프란치스코)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891년 1월 20일 경기도 안성군 미양면 갈전리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산고 후유증으로 어머니 이 막달레나마저 잃고 외가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천주교 박해가 공식적으로 끝난 뒤였지만, 박해가 남긴 상처와 사회적 불이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할아버지 남종삼 성인은 승지 벼슬을 지낸 고위 관료였지만 병인박해 당시인 1866년 3월 7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고, 증조할아버지 남상교 역시 같은 해 공주감영에서 순교했다. 이 집안에서는 3대에 걸쳐 네 명의 순교자가 탄생했다.

특히 남종삼 성인 가문은 대원군에게 프랑스 선교사와의 협력을 요청했다는 이유로 ‘모반부도죄’의 죄명을 받고 관직을 박탈당했으며 후손들은 노비 신분으로 전락했다가 갑오개혁 이후에야 신분을 회복할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신앙의 자유를 되찾은 남 전 회장은 한학을 익힌 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이후 충북 장호원본당(현 감곡본당)이 운영하던 매괴보통학교 교사로 일했고, 1921년부터 20년 동안 감곡면장을 맡았다. 깊은 신앙과 행정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여러 사제들의 추천으로 경성대목구에서 교회 업무를 도왔다.

남종삼 성인의 손자로 태어나
프란치스코 제3회에 투신하며
박해의 아픔 화해로 씻어내고
집터마저 기증하며 나눔 실천

■ 화해와 용서, 프란치스칸의 삶

남상철 회장이 순교자의 후예로서 선택한 길은 프란치스칸 영성을 따르는 삶이었다.

그는 순교자 후예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는 다짐으로 프란치스코 제3회(현 재속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다. 1939년 7월 서울 종현성당(현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고(故) 오기선 신부(요셉, 1907~1990) 주례로 봉헌된 미사에서 ‘아우구스티노’라는 수도명으로 입회한 뒤 1940년 10월 종신서약을 했다. 이후 선종할 때까지 39년간 제3회에 몸담고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로 살며, 1964년 제4대 제3회 서울형제회 회장에 선출돼 봉사했다.

그의 신앙은 말보다 삶으로 드러났다. 6·25전쟁 이전부터 서울 삼양동 자택을 공소로 내놓아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도왔고, 자신의 집터를 기증해 미아3동본당 설립에도 힘을 보탰다. 본당 초대 총회장으로 봉사한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1967년 교통사고로 대퇴골 골절상을 입은 뒤 휠체어 생활을 하게 되면서, 그는 1968년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훗날 성인이 되는 남종삼 순교자의 시복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너희가 대신 참석해 순교자의 후손답게 살아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병고 속에서도 신앙인의 삶을 이어가며, 선종 하루 전까지도 이웃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그는 1978년 6월 13일 87세의 나이로 하느님 품에 안겼다.

프란치스칸으로서의 삶은 가족 안에서도 이어졌다. 아내 서상순(엘리사벳)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3남 5녀 가운데 장녀 남형우(요한), 차녀 남순우(레지나), 삼녀 남공우(카롤리나)를 1940년대 초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입회시켰다. 순교자의 후예로 받은 은총에 보답하고자 자녀 가운데 수도자가 나오기를 염원했기 때문이다.

그의 화해와 용서 정신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다. 자신의 집안에 종교 박해를 가한 흥선대원군의 손자로 해방 후에도 일본에 머물던 영친왕이 고국에 돌아올 수 있도록 1947년 ‘영친왕 환국추진위원회’ 회장을 맡은 것은 프란치스칸의 화해와 용서 영성을 실천한 일면이다.

한국교회 뿌리 찾기에도 앞장섰다. 1962년 경기도 여주와 양평, 광주 일대 답사를 거듭한 끝에 여주군 금사면 하품리에서 주어사 터임을 확인할 수 있는 비석을 발견했다. 이 과정과 의미는 「경향잡지」에 ‘한국 천주교의 요람지인 주어사가 발견됨’이라는 제목으로 3회에 걸쳐 소개됐다. 오늘날 천진암성지 개발의 중요한 단초가 된 작업이었다.

그가 남긴 유서 역시 신앙인들에게 귀감이 된다. 순교자들의 고통을 기억하며 검소하고 조용한 장례를 치를 것을 당부했고, 후손들이 기억해야 할 성직자와 신자들의 이름까지 기록했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보다 교회와 이웃을 먼저 생각한 삶이었다.

이현주(가타리나) 재속프란치스코회 전 국가봉사자는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순교하기를 원했지만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아 순교자가 되지는 못했다”며 “남상철 회장이 보여 준 삶은 프란치스칸 영성의 구현인 동시에 순교 신심의 실천”이라고 말했다.



■ 남상철 회장과 의정부교구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 묘소 남 전 회장은 선종 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20-2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 묘소’에 안장됐다. 이 묘소는 1968년 그가 의령 남씨 묘역으로 조성한 곳으로, 아버지 남규희, 할아버지 성 남종삼, 할머니 이조이(필로메나), 증조할아버지 남상교가 함께 잠들어 있다. 남종삼 성인의 유해는 순교 후 박순집(베드로)에 의해 수습돼 용산 왜고개에 매장됐다가 1909년 발굴돼 명동대성당에 안치됐다. 이후 1967년 절두산순교성지 성해실로 옮겨졌고, 일부 유해는 현재 가족 묘소에 모셔졌다.  2004년 12월에는 김진용(마티아) 인천교구 부평2동본당 총회장의 노력으로 묘소 입구와 주변에 안내판과 비석이 설치됐다. 의정부교구 순교자공경위원회는 2018년 9월에 남종삼 성인 묘비 제막식을 거행했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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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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