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복음에서 포도밭 임자는 두 번 나오고, 그가 보낸 종들도 두 번 나옵니다. 그런데 소작인은 무려 여섯 번 나옵니다. 주인의 자리는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만 잠깐 비칠 뿐, 한복판은 온통 소작인들의 차지입니다. 그러니 이 비유는 결국 소작인들의 이야기, 곧 우리 이야기입니다.
포도밭은 이미 다 마련돼 있었습니다. 주인이 포도밭에 울타리를 두르고 확을 파고 탑을 세웠습니다. 소작인들이 도착했을 때 그들이 할 일은 가꾸고 거두는 일뿐이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 대목 앞에서 주인은 하지 않은 일이 하나도 없다고 놀라워합니다.
우리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맨땅에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의 은총, 어머니의 기도, 먼저 믿은 이들이 흘린 피, 오늘 아침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진 숨결까지 포도밭은 우리가 오기 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필로칼리아의 은수자 마르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선행은 공로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에 대한 응답이라고. 그러므로 소출이란 우리가 만들어 내는 성과가 아니라, 받은 것을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멀리 떠났습니다. 이 떠나심이 비유에서 가장 신비로운 대목입니다.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하느님께서 자리를 옮기신 것이 아니라 오래 참으신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하느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보이는 그 긴 시간은, 사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비켜서신 자리입니다. 곁에서 지켜보되 감시하지 않으시는 사랑, 하느님의 비움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유의 자리에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비극은 아주 짧은 한 문장이었습니다. “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이고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맡았다’는 말이 ‘차지하자’는 말로 바뀌는 데는 한 문장이면 충분합니다. 필로칼리아의 스승들은 이것을 소유의 생각이라 부릅니다. 맡겨진 것을 제 것으로 셈하기 시작하는 순간, 마음은 이미 살인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내 가정, 내 자녀, 내 직분, 내 성당이라고 말할 때, 그 ‘내’라는 한 글자가 어느새 울타리에서 감옥으로 바뀌곤 합니다.
여기서 주인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종이 맞아 죽자 더 많은 종을 보내고, 그들마저 죽자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냅니다. 힘을 키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더 약한 이를 보냅니다. 무장한 군대가 아니라 아들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폭력 앞에서 더 강해지시는 분이 아니라 더 약해지시는 분입니다.
아들은 포도밭 밖으로 내던져져 죽임을 당합니다. 마태오복음은 이 순서를 일부러 그렇게 적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참혹한 이야기 끝에 시편을 읊으십니다. “집 짓는 자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버려진 아들이 곧 버려진 돌입니다. 그리고 그 돌은 앙갚음하지 않고 기초가 됐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에서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빼앗아 가시는 장면을 상상하지 마십시오. 열매를 내지 않는 포도밭은 빼앗기기 전에 스스로 포도밭이기를 그만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을 어떤 민족을 버리고 다른 민족을 택하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새 소작인은 멀리서 오는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손을 펴는 바로 그 소작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칠 소출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제때에’ 바치라고 합니다. 수확에는 때가 있습니다. 용서에도 때가 있고, 화해의 전화 한 통에도 때가 있고, 병상에 계신 분을 찾아가는 일에도 때가 있습니다. 소출은 결코 거창하지 않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한 그대로 참된 것, 옳은 것, 사랑스러운 것 하나를 마음에 품고 그대로 사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미사성제 때 빵과 포도주를 제대에 올립니다. 그것은 밀밭과 포도밭의 소출입니다.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을, 우리 손으로 조금 매만져 다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미사는 소작인들의 예식입니다. 그러니 소작인으로 산다는 것은 서러운 일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버려진 돌이 머릿돌이 되신 그분께서 오늘도 우리 손에 포도밭을 맡기십니다. 제때에, 기쁘게 돌려드립시다.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