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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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신앙이 지식보다 더 근원적인 차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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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그분의 오른쪽과 왼쪽에는 두 사람이 매달려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이를 저주하고 있었다. 그 누가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한 사람, 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를 주의 깊게 바라보는 가운데 그는 자기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죽음을 수용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었다.

우도는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오로지 사랑의 길만을 간,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끝내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죽음을 이해하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장나지 않음을 확신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라고 말함으로써 자기 죽음에 대한 수용과 자신의 믿음을 드러냈고, 최종 결단으로서 자기 자신과 세상과 하느님과의 화해를 이루었다.

이러한 우도의 마음을 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죽음을 수용하고 하느님을 굳게 신뢰한 인간이 절대로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언하셨다.

바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이다. 그분은 죽음을 거부한, 세상과 자신 그리고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한 좌도에게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이 죄수의 죽음을 내리덮은 어두움과 적막은 죽음이 영원한 죽음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인간에게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인간에게는 영원한 멸망과 생물학적인 죽음만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을 믿음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인간은 믿음으로써 고통과 죽음 너머에까지 나아갈 수 있다. 생각함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그렇게 될 수 있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말대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게 아니라 파스칼의 말대로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redo ergo sum)”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보다는 믿는다는 것이 더 근원적인 차원이고 지식보다는 신앙이 더 근본적인 차원인 것이다. 지식이 아니라 신앙이 고통과 죽음을 넘어가게 해주고 새로운 차원의 삶을 시작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게 해준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이성은 침묵할 뿐이지만, 신앙은 우도처럼 절망의 순간에도 하느님을 바라보며 영원한 낙원을 신뢰하게 하는 초월적 힘이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의 참된 완성은 유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무한한 하느님 자비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신앙의 차원에서 비로소 이루어지는 법이다. 이렇듯 생각하는 지식을 넘어서는 온전한 신앙만이 인간을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는 가장 온전하고도 근원적인 구원의 길이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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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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