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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66) 신유박해 20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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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기와 더불어 시작되는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교회사에 귀중한 이정표가 될 순교 신심을 되살리는 새로운 도정에 오른다. 교회는 한국 천주교에 첫 번째 대규모 순교자를 안겨준 신유박해 200주년을 맞아 오는 2월 2일부터 2002년 2월 4일까지 1년 동안 이어지는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 기념 기간’에 공식 돌입한다. 이에 맞춰 교회는 다채로운 기념사업을 개최해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를 이루었던 순교자들의 삶을 오늘에 되살림으로써 신앙의 스승이요 모범인 순교자들의 정신을 새롭게 하는 장을 마련해 나간다.”(가톨릭신문 2001년 1월 21일자 1면)

새 천년기를 이제 막 시작한 2001년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대규모 박해이자 4대 박해 중 하나인 신유박해가 발생한 지 꼭 2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새로운 천년기를 맞아 복음 선포의 새 전기를 마련하고자 했던 한국교회는 박해 20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며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열고,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위한 발걸음에 힘을 더했습니다.

한국교회 최초의 대규모 박해

신유박해는 1801년(순조 1년) 조선 조정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전개된 최초의 대규모 천주교 박해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천주교에 대한 종교적 배척에 머물지 않고, 정조 사후의 권력 재편과 남인·시파 계열 인사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복합적으로 얽힌 사건이었습니다.

남인 계열 관료를 중용하며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피하던 정조가 1800년 세상을 떠난 후,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시작했습니다. 노론 벽파를 배경으로 한 정순왕후는 음력 1801년 1월 10일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오가작통법을 동원해 전국의 천주교 신자를 색출하도록 했습니다.

박해는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등이 체포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됐습니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사형을 면했으나, 정약전은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로, 정약용은 장기를 거쳐 강진으로 유배됐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1801년 4월 24일 자수해 5월 3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여성 회장 강완숙도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습니다. 전주에서는 ‘호남의 사도’ 유항검을 비롯해 아들 유중철과 며느리 이순이 동정부부 등이 순교했습니다.

한편, 서양 군함 파견을 요청하는 내용 등이 담긴 ‘황사영 백서’가 발각되면서 조정은 천주교 신자들을 외세와 내통하는 세력으로 몰아갔습니다. 많은 신자가 처형되거나 옥사했고, 살아남은 이들도 유배와 피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신유박해의 영향과 의미

신유박해는 초기 조선 천주교회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지만, 신앙 공동체의 구성과 복음 전파 방식에 변화를 불러오는 계기도 됐습니다.

첫째, 지식인 중심으로 출발한 교회가 서민층에 더욱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지도급 신자들이 대거 순교한 뒤에도 중인과 상민, 천민, 여성 등 다양한 계층의 신자들이 신앙을 이어갔습니다. 박해와 가난 속에서 신앙을 지킨 이들의 삶은 교회를 지탱하는 힘이 됐습니다.

둘째, 신자들의 피난과 이주를 통해 교우촌이 형성되고 확산됐습니다. 박해를 피해 산간벽지로 숨어든 신자들은 옹기를 굽거나 화전을 일구며 생계를 유지하고, 서로 도우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신자들의 흩어짐은 오히려 복음이 더 넓은 지역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셋째, 평신도 중심의 신앙 공동체가 교회를 지탱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유일한 성직자였던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뒤, 1834년 유방제 신부가 입국할 때까지 조선 교회는 30여 년 동안 성직자 없이 신앙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이 공백 속에서 평신도 지도자들은 신자들을 모아 기도하고 교리를 가르치며 공동체를 돌봤습니다. 성직자 영입을 위한 노력도 이어졌습니다. 평신도들의 헌신과 공동체의 결속은 거듭되는 박해 속에서도 교회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신유박해 200주년 기념행사

한국교회는 1984년 103위 시성의 기쁨을 누렸지만, 이들은 기해·병오·병인박해 순교자들로 신유박해 순교자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한국교회는 신유박해 200주년을 맞아 교회의 초석을 놓은 초기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을 재조명하고, 그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현양 사업을 펼쳤습니다.

대표적인 행사는 서울대교구가 9월 16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거행한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 기념 순교자 현양 신앙대회’였습니다. 이에 앞서 9월 1일에는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성당에서 ‘순교자 현양의 밤’이 열렸습니다. 명동본당과 한국교회사연구소는 9월 1일부터 22일까지 토요일마다 명동대성당 문화관에서 초기 천주교회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공개 학술강좌를 마련했습니다. 네 차례에 걸쳐 두 강좌씩 총 여덟 강좌가 진행됐습니다.

전주와 청주 등 각 교구에서도 신유박해의 역사를 기리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춘천교구는 신자들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순례성당을 추가로 지정했습니다. 학술 심포지엄과 순교 관련 유물 전시 등도 이어지며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는 장을 마련했습니다.

초기 순교자 시복시성에 기여

교회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성과는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위한 통합 추진 체제가 구체화됐다는 점입니다. 주교회의는 이미 1997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시복시성 작업의 통합 추진을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준비를 바탕으로 2001년 3월 22일 춘계 정기총회에서는 시복시성 청구인을 주교회의로 변경하고, 담당 교구장으로 마산교구장 박정일(미카엘) 주교를 선출했습니다. 같은 해 10월 18일에는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구성돼 첫 회의를 열었습니다.

이후 2002년 3월 7일 시복 추진 대상자 124위가 확정됐고, 조사와 심사 과정을 거쳐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주례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으로 이어졌습니다. 124위 가운데 신유박해 순교자는 53위로 가장 많았습니다. 2001년의 기념사업은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앞서 시작된 시복시성 추진에 힘을 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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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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