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오복음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해서 사랑해야 한다고 전하면서,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마태 22,38)이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마음’을 뜻하는 단어는 ‘카르디아(καρδία)’입니다. 카르디아는 본래 신체 기관으로서의 심장을 가리키던 말입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어에서 심장은 단순한 생물학적 기관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중심부로도 이해되었지요. 이는 마치 고대 히브리어에서 사람의 신체 기관인 내장이나 자궁을 가리키는 말이 모성애와 하느님의 자비를 의미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카르디아는 그래서 감정이나 의지, 기억 등 인간의 내적인 활동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의 “마음을 다한다”라는 표현은 감정이나 정서적 측면뿐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내적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와서’ 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내 의지와 욕구, 원의와 희망 모두를 남김없이 건다는 거지요.
이를테면,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카르디아)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마태 18,35)이라는 말씀에서 카르디아가 의미하는 용서란, 누가 시켜서 강제적으로 하거나 피상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해서” 한다는 건 온전하고 자유로운 내 결단으로, 의지적이고 자발적으로 행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목숨’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프쉬케(ψυχή)’는 호흡하고 살아있는 육체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에서 ‘생명체’를 가리키는 말에 포함된 단어가 프쉬케입니다.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신 하느님에 의해 인간이 생명체가 되었으므로, 목숨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루카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프쉬케)을 되찾아 갈 것이다”(루카 12,20)라는 말씀은, 인간의 목숨과 생명의 주관자는 결국 하느님이라는 걸 말해주지요.
따라서 “목숨을 다한다”라는 말씀은 목숨이 본래 시작된 원주인이신 하느님께 목숨을 다시 돌려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생명의 주관자께 나의 생을 맡겨 드리고,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내 삶을 주님께 ‘송두리째’ 맡긴다는 뜻이지요.
셋째, ‘정신’으로 번역한 단어는 ‘디아노이아(διάνοια)’입니다. 디아노이아는 인간의 앎과 이해, 이성과 지성, 깨달음이나 통찰력을 이르는 말입니다. 진리를 파악하는 능력이자 정신의 활동이지요. 단순한 정보나 지식 또는 머릿속에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나 단상이 아니라, 사물을 분별하고 이해하여 숙고하고 판단하는 정신의 능력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들 안에 자리 잡은 무지와 완고한 마음 때문에, 그들은 정신(디아노이아)이 어두워져 있고 하느님의 생명에서 멀어져 있습니다”(에페 4,18)라며 인간의 온전치 못한 정신을 비판했는데, 이처럼 인간은 ‘제정신’일 때도 있지만 자신의 무지와 완고함 때문에 ‘무슨 정신’으로 사는지 모르는 때도 많습니다.
따라서 “정신을 다한다”라는 말씀은 무지와 완고한 마음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맑은 정신의 반대는 완고하고 경직된 사고입니다. 정신이 깨어 있는 사람은 생각이 유연하여,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쉽게 옹졸해지지 않습니다. 정신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고집과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넓은 마음과 복음의 정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꺼운 마음으로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삶(목숨)을 송두리째 그분께 맡기십시오. 완고한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어느새 하느님을 닮아있는 여러분을 발견할 것입니다.

글 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