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사물들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감각이 필요하다. 자연과학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올바른 이성이 필요하다. 예술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심미적 감각을 통해 작품의 본질적인 표현과 교감이 이루어져야 한다. 단순히 어떤 색깔로 그렸느냐를 안다고 해서 그 작품을 온전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고통이 무엇인가? 사랑이 무엇인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고통과 사랑에 관한 소설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고통과 사랑이 무엇인지는 오직 인간이 그것을 직접 경험해 봄으로써만 깊게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운전하는 것과도 같다. 운전 이론을 아무리 배운들 운전을 잘할 수는 없다. 운전을 실제로 해보아야 운전을 잘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실존에 관계되는 인식 대상들은 객관적이고 구속력 없는 사고만으로는 부족하며, 실존적이고 실행이 따르는 사고를 통해서만 내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얼마나 큰 열정과 사랑을 가지고 실행하느냐에 비례하여 인식 대상의 본질적인 내용이 더욱 깊게 인식된다. 즉 고통과 사랑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인격적 투신을 하는 만큼 이해되고 인식되는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2003년 문규현(바오로) 신부는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하여 부안에서 서울까지 300km가 넘는 길을 삼보일배로 갔다. 그는 삼보일배 둘째 날을 마치고 드린 저녁미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제 생활 28년을 보내며 이제야 주님께 참된 미사를 봉헌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북한에서도 미사를 드렸다. 그는 미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삼보일배를 마친 뒤 드린 미사를 통해 미사가 무엇인지, 사제가 어떤 존재인지를 더욱 깊게 알게 됐다. 육체의 고달픔과 함께 주님이 가신 그 고난의 길을 걸어가면서 바치는 미사를 통해, 자신의 온 인격을 투신한 미사를 통해 책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더 깊은 미사의 세계를 알게 된 것이다. 인격적 투신이 있는 만큼 알게 되는 법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느님께 인격적 투신(신앙)을 한 만큼 알게 되어 있다. 계시하시는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신앙이라는 특별한 교감, 즉 인격적 투신인 신앙이 필요하다. 지성과 의지의 온전한 순종인 이 신앙으로 인간은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신앙은 참된 실재인 하느님을 인식하게 해주는 인간 인식의 원리이다. 이 신앙이 깊어져야 하느님의 얼굴이 보인다. 인간이 하느님께 자신을 다 바친 만큼 하느님의 얼굴이 인간 영혼에 아로새겨진다.
그러므로 신앙은 단순히 머리로 동의하는 이론이 아니라, 삶 전체를 던져 그분과 하나가 되는 거룩한 투신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깊이 걸어 들어갈 때, 비로소 세상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던 신앙의 진리가 영혼의 눈을 뜨게 만든다.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 참된 기쁨을 발견하듯, 우리의 인격적 투신을 통해서만 그분의 살아 계신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그분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동행하며 닮아가는 신비로운 여정이다. 결국 우리가 자신을 온전히 비워 내고 그분께 우리의 삶을 봉헌할 때, 신앙은 하느님을 알아 뵙게 하는 가장 확실한 인식이 된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