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미사 복사에 참여하기 위해 새벽부터 부지런히 서둘러 성당에 도착했다. 탈의실에서 복사복을 벗고 있는 사내아이들과 마주쳤다. 너무 기특해서 “잠도 부족할 텐데 힘들겠네” 하고 물으니, 똘망똘망한 아이 둘이 동시에 “졸려요” 하고 대답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라고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수십 년 전, 초등학교 4학년 복사 시절로 되돌아갔다. 당시 내가 다니던 성당에는 두 분의 외국인 신부님이 계셨는데, 발음이 서툴러 전달이 잘 안돼도 느낌으로 강론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시절은 고민도 걱정도 없이 오직 하고 싶은 것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입학 후 길었던 냉담을 2009년 한강본당에서 비로소 풀었고, 두 달 전 주보에서 성인복사단 모집 공고를 보자마자 신청해 올해 7월 5일, 첫 성인복사단 데뷔식을 하게 되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듯, 수십 년 만에 맞이하는 복사 봉헌을 앞두고 마음은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지난 목요일, 예기치 않게 새끼발가락을 다쳤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번 주일 첫 복사를 서야 하는데….’ 통증이 쉽게 가시지 않아 애태우던 새벽, 숨을 죽인 채 슬그머니 발을 디뎌보았다. 거짓말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잦아들어 있었다.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낸 채 제대를 향해 나아갈 준비를 했다.
머릿속에는 수십 년 전 까까머리 초등학생 시절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서툰 한국말을 쓰시던 신부님 밑에서 뜻도 모를 라틴어 응답을 재잘거리던 그 시절의 추억은, 지금 마주한 복사 예식 앞에서는 아무런 무기가 되지 못했다. 안내서를 읽고 또 읽어도 머릿속은 엉켜만 갔다. 막막함이 극에 달했을 때 도착한 신부님의 문자 한 통은 구원의 메시지였다. ‘미사 시작 40분 전, 대성전에서 실전 연습을 하겠습니다.’ 연습을 거치고 나니, 비로소 엉켜 있던 전례의 맥락이 풀려나갔다.
마침내 미사가 시작되었다. ‘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찾아온 것도 잠시, 성찬의 전례가 시작되자 거대한 긴장감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숨이 턱 막히고 온몸의 근육이 굳어갔다. 아찔한 혼돈의 한복판에서 나는 평생 알지 못했던 놀라운 세 가지 진실을 마주했다. 첫째, 늘 거대하고 웅장하다고 생각했던 한강성당의 대성전이 한눈에 훤히 들어올 만큼 작게 보였다는 사실이다. 둘째, 그동안 무심히 바라보았던 복사단 아이들이 새삼 위대해 보였다는 점이다. 그 작은 몸으로 이 무거운 중압감을 견뎌내고 있었다니, 아이들이 아니라 거인처럼 느껴졌다. 셋째, 학창 시절 그토록 떨리게 했던 시험이나 면접보다도 지금 이 제대 위에서의 떨림이 훨씬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좌충우돌 끝에 무사히 미사를 마치고 성당 문을 나섰다. 성당 밖은 흐릿하게 가라앉은 날씨였고, 불어오는 바람이 콧잔등을 스치며 ‘수고했다’는 위로를 건네는 듯했다. 짧고도 격렬한 시간이었지만, 마침내 해냈다는 깊은 성취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무거웠던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졌고, 발걸음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뿐했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슬픔 속에서 시작된 성당 나들이가 이제는 내 삶의 또 다른 기점이 되었다. ‘제1의 탄생’이 세상의 빛을 본 순간이고, ‘제2의 탄생’이 신앙의 길로 다시 들어선 순간이라면, 오늘 이 눈부시고 거룩한 ‘전례 복사’의 시간은 긴장을 은총으로 승화시킨 나만의 ‘제3의 탄생’일 것이다. 초긴장의 떨림으로 얼룩졌던 첫 데뷔식 날, 나는 감히 조용히 고백해 본다. 떨리고 두려웠으나, 마침내 주님의 품 안에서 한 걸음 더 자라났노라고.
글 _ 이정민 베드로(서울대교구 한강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