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0일
사람과사회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과연 전쟁을 통해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까?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4년째에 접어든 우크라이나 전쟁, 끊이지 않고 지속되는 중동 분쟁과 테러의 악순환, 인공지능(AI)에 기반을 둔 치명적 자율 무기 체계의 새로운 위협은 인류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그럼에도 고대부터 현대까지 전쟁을 일으키는 이들은 자기 나라가 당한 불의를 되갚아서 국민의 행복을 되찾으려 한다고 강변한다. 이런 상황에서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된다. ‘과연 전쟁을 통해 인류는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까?’

전쟁을 옹호하는 이들은 종종 ‘정당한 전쟁론(bellum iustum)’을 자신의 이론적 근거로 삼는다. 이 이론을 주장한 이들 중에는 놀랍게도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성인들도 등장한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정당한 전쟁론이 오늘날에도 유효한가, 아니면 폭력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는가’라는 의문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토마스의 이론을 검토함으로써 이에 대한 답을 찾아보자. 

‘국민의 행복’ 명분 내세운 전쟁, 결국 인류 전체 위기로 내몰아

십자군 전쟁 등 폭력 악순환, ‘정당한 전쟁론’에 한계 명확

토마스의 평화 사상과 정당한 전쟁론

토마스에게 평화(pax)는 단순한 전쟁의 부재나 무력 억지에 의한 휴전이 아니라 ‘질서의 평온함(tranquillitas ordinis)’이다. 이는 자기 자신, 이웃, 하느님과의 삼중 질서가 조화를 이루는 상태이며, 인간이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한 필수 요건이다.(II-II,29,2) 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실제로 토마스는 전쟁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토마스는 전쟁을 엄격한 규범 아래 두기 위해 「신학대전」에서 세 가지 요건을 동시에 갖출 것을 요구했다.(II-II,40,1)

첫째는 군주의 권위(auctoritas principis)로서 전쟁 선포는 공공선을 위임받은 공적 권력에만 속한다. 개별 국민은 상급 재판관의 판결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고 대중을 소집할 권한도 없으므로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 전쟁은 사적 보복이 아니라 공적 재판과 처벌 행위의 연장이다.

둘째, 정당한 근거(causa iusta)가 필요한데, 상대에게 명백한 불의가 있어야 한다. 자국민의 악행을 징벌하지 않거나 부당하게 빼앗은 것을 돌려주지 않을 때가 이에 해당하며, 이때 피해국은 ‘교환 정의’에 따라 권리 회복과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셋째, 올바른 의도(intentio recta)가 중요한데, 권위와 근거가 정당해도 의도가 악하면 전쟁은 악이 된다. 전쟁에서 추구할 선은 복수나 제압이 아니라 오직 참된 평화다.

토마스는 어쩔 수 없이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라도, 정의를 완전히 실현하기 위해서 ‘선을 행함’과 ‘악을 회피함’이 모두 필요하다고 보았다.(II-II,79,1) 전쟁에서 선을 행함은 죽음의 공포에 맞서 공공선을 지키는 ‘용기’이고(II-II,123,5), 악을 회피함은 전쟁을 타락시키는 악습을 통제하는 일이다.

토마스가 꼽은 악습은 적에게 해를 끼치려는 탐욕스러운 마음, 보복의 잔인성, 화해할 수 없는 분노, 권력에의 충동 등이다. 이것들을 막는 것이 절제의 덕에 속하는 ‘온유(mansuetudo)’와 ‘관용(clementia)’인데, 이를 통해 내면의 분노를 억제하고 잔인한 만행을 피해야 한다.(II-II,157,1) 더 나아가 인간적 덕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전쟁의 야만성에 대해서는 성령의 은사인 ‘경건함(pietas)’이 필요하다. 이 은사는 적대자까지 하느님께 속한 이웃으로 보게 하여 무자비한 보복을 막는다.(II-II,121,1)

전쟁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악순환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가 제시한 윤리적 의도와 달리 정당한 전쟁론은 역사 속에서 폭력을 합법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자주 악용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십자군 전쟁(1096~1291년)이다.

성지 회복이라는 종교적 명분은 영토 확장, 재물욕, 정치적 지배욕과 결합했다.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명분은 병사들의 양심을 마비시켜 잔혹한 학살을 부추겼고, 이슬람 측의 보복을 불러 폭력의 악순환을 낳았다. 이는 토마스가 경고한 온갖 악습들이 거룩한 명분의 탈을 쓰고 분출된 것이다. 그 결과는 ‘참된 평화(pax vera)’가 아니라 공포와 강압, 복수심이 잠복한 ‘외관상의 평화(pax apparens)’였다.

근현대에도 같은 왜곡이 반복되었다. 18세기 이후 세력균형 체제에서 정당한 전쟁론은 규범력을 잃고 국가 이익을 위해 전쟁을 동원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전쟁 불가피한 상황이라 해도 공공선 지키며 악습 통제하고

비폭력 외교·참사랑 실천으로 질서 속 정당한 평화 추구해야

현대 기술 문명과 정당한 전쟁론의 한계

더 나아가 현대 무기 체계는 정당한 전쟁론의 전제 자체를 무너뜨린다. 핵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는 무차별적 파괴와 공멸을 부르므로 ‘비례성 원칙’과 ‘전투원·비전투원 구별 원칙’을 무력화한다. 그 피해는 어떤 정치적·윤리적 목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심지어 AI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치명적 자율 무기(LAWS)’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기계와 알고리즘은 도덕적 판단력과 양심이 없어 윤리적 책임 주체가 될 수 없다. 오인 살상이 일어나도 책임질 주체가 없는 법적·윤리적 공백이 생기며, 기계가 인간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근본적 침해다.

이에 현대 가톨릭교회는 전쟁 자체를 거부하는 입장으로 전환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회칙 「지상의 평화」(1963년)에서 진리, 자유, 정의, 사랑을 평화의 네 기둥으로 제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형제들」(2020년)에서 정당한 전쟁의 합리적 척도에 호소하는 것이 더는 불가능하다고 보며 “절대로! 다시는! 전쟁은 안 됩니다”라고 선언했다.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2016년)도 지난 1700년간 정당한 전쟁론이 분쟁을 예방하기보다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쓰였음을 반성하고 ‘정당한 평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촉구했다.

현대인들은 여러 차례 전쟁의 참혹함을 철저하게 경험했으면서도, 어느덧 전쟁을 비현실적인 컴퓨터 게임처럼 바라보는 듯하다. 또한 일부 강경 세력은 여전히 자신이 내세운 명분을 위해 개인들의 소중한 생명을 희생시키려 한다. 그러나 다른 집단을 제압하려는 욕심과 부당한 이익을 손쉽게 취하려고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은 무한하고 무질서한 욕망 때문에 어떤 선 안에서도 안식을 얻지 못한다.

또 무력으로 정복해도 피정복자의 반발과 보복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가 얻는 것은 ‘외관상의 평화’뿐이며, 내면은 불안과 공포, 악순환의 격정에 갇힌다. 따라서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철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나 참된 행복에 결코 이를 수 없다. 인류가 가야 할 길은 비폭력적 외교와 정의의 실현, 이웃에 대한 참사랑으로 ‘질서의 평온함’으로서의 정당한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6-10-20

관련뉴스

말씀사탕2026. 10. 20

시편 121장 5절
주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주님은 너의 그늘, 네 오른쪽에 계시도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