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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국교회 성모 신심의 상징 ‘성모성심회’ 탄생 180주년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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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신자들은 전 세계 어느 교회 신자들 못지않게 강한 성모 신심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 성모 신심의 연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으로부터 꼭 180년 전, 공주 수리치골에서 성모성심회가 발족한 사실은 한국교회사에서 성모 신심을 논할 때 매우 큰 상징성을 갖는다. 성모성심회 탄생 180주년에 담긴 교회사적 가치를 알려주는 특별기고를 싣는다.

1846년 ‘성모성심회’ 발족… 한국교회 첫 성모 신심 단체 탄생

정행만 신부 노력으로 현장 발굴, 현재 수리치골 성모성지로 성역화

성모 신심의 발상지

“인간을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시킬 수는 없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이 문장을 볼 때면 늘 우리 한국교회의 순교자들이 연상되곤 한다. 올해 11월 2일은 대전교구 공주 수리치골에서 ‘성모성심회(Confraternitas Sanctissimi et Immaculati Cordis Mariae)’가 발족된 지 정확히 180주년이 되는 날이다. 어둡고 불안했던 조선교회를 간절한 마음으로 성모님께 봉헌한 이 사건을 기념하면서, 아직 한국교회와 신자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고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건과 그 소중한 가치는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수리치골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성심께 한국교회와 우리 겨레를 봉헌하고 한국에서 가장 처음으로, 성모님과 관련된 신심단체인 성모성심회가 발족된 곳이다.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1845년 8월 17일 중국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님(1808~1853, 제3대 조선교구장)으로부터 서품을 받으셨고, 그해 10월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님(1818~1866, 성인, 제5대 조선교구장)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셨다. 그러나 조선교회 선교의 열망을 품고 활동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체포되셨고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셨다. 서품을 받은 지 1년을 조금 넘긴 상황이었다.

김대건 신부님과 함께 입국한 두 명의 프랑스인 성직자들, 곧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님은 김 신부님의 체포 소식을 듣고 자신들의 활동을 중지한 채 충남 공주의 깊은 산중으로 숨어들어 갔는데, 그곳이 바로 수리치골이다. 박해와 순교의 소식을 전해들으며 불안과 공포, 안타까움 속에 애통해하시던 중, 1846년 11월 2일 수리치골의 작은 오두막에서 몇 명의 신자들을 모아 암울한 조선교회와 그곳의 사람들을 성모성심께 봉헌하시고, 그들을 성모성심회에 가입하도록 권유하셨다.

4일 뒤 성모성심회 본부가 있는 프랑스 파리의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 데쥬네트 신부(1778~1860, 성모성심회 설립자)에게 한국의 성모성심회 분회를 언급하며 이 명단에 속한 한국 교우들을 성모성심회 본부 명부에 올려달라고 청하는 서신을 송달했다.

“교황님의 결정으로 조선교회는 7년 전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특별한 주보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 저희는 신심단체 하나를 신설하여 조선교회를 자비로우신 그분의 성심께 봉헌하기로 했습니다…주임신부님께서는 (성모성심회의) 분회 명단에 저희가 세운 작은 분회를 올려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조선 분회 설립 장소는 수리치골이라는 계곡에 있는 어느 초라한 오두막이요 설립일은 1846년 11월 2일입니다.”(1846년 11월 6일, 데쥬네트 신부에게 보낸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공동 서한에서)

“그들은 경당이 없어 많은 신자가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들은 외딴 곳에 열심한 교우 한 가족이 사는 조그마한 오두막을 골라잡았다. 1846년 11월 2일에 성모 마리아와 새로운 결합을 튼튼히 하는 것을 기뻐하는 몇몇 신자 앞에서 ‘성모성심회’를 창설하였다. 4일 뒤 선교사들은 승리의 성모 대성당 데쥬네트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어, 수리치골에 이렇게 세운 작은 분회를 그의 명부에 올려 달라고 청하였다.”(달레 「한국천주교회사」)

데쥬네트 신부와 성모성심회

성모성심회는 본래 프랑스 파리에 있는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 데쥬네트 신부에 의해 설립된 단체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폐허가 된 본당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신자들이 성당으로 돌아오지 않자 고심하던 중, 1836년 12월 3일 첫 토요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너의 본당을 지극히 거룩하고 티 없으신 마리아의 성심께 봉헌하여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사실 당시 데쥬네트 신부는, 4년간의 헌신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사목적 결실이 요원하자 결국 본당 사도직을 포기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면의 소리를 듣고 자신의 본당을 성모성심께 봉헌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마침내 1836년 12월 16일에 성모성심회를 설립하는데, 이 신심단체는 성모님을 공경하고 성모님의 전구로 하느님께 죄인의 회개를 청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단체였다. 그 후 성모님께로부터 많은 은혜를 얻어 본당은 전처럼 많은 교우들이 생겨났고 신앙적으로도 열성과 활력을 되찾았다고 한다.

회원들은 날마다 성모님께 ‘죄인의 의탁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혹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고 기도하고, 마지막에 성모송을 한 번 외워야 하며, 이 외에도 ‘성모무염시태 패’(기적의 패)를 몸에 지니고, 자주 성체를 영할 것을 권고받았다. 이 성모성심회는 2년 뒤인 1838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에 의해 인준됐고, 그 지부가 세계 여러 곳에 설립됐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1984년 5월 6일 한국 103위 순교성인 시성식에 오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수리치골을 거명하시며 이 장소의 의미를 공식적으로 상기하셨다.

“일찍이 1837년에 앵베르 주교님이 한 성모 축일에 드디어 이 땅에 들어오는 데에 성공하자, 무염시태 성모를 이 나라의 주보로 모실 수 있게 해 달라고 성좌에 청한 바 있었습니다. 이 소원은 그의 후계자인 페레올 주교님이 1846년 무서운 박해 하에 공주 땅 수리치골에서 이 나라의 겨레와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께 조용히 봉헌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4년 한국 방문 중 5월 6일 명동대성당에서 하신 연설문에서)

1866년 병인박해로 수리치골의 교우촌은 폐허가 됐고, 그나마 수리치골에 남아 있던 교우들은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면서 평지로 이주해 이내 그 자취가 사라지게 됐다. 그렇게 역사의 흐름에서 종적을 감추었던 수리치골이 다시 한국교회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게 된 생생한 순간이었다.

정행만 신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설립자인 정행만 신부(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917~2004)는 1984년 한국을 방문하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말씀을 듣고 성모성심회의 발상지인 수리치골이 어떤 곳인지 답사하려는 열망을 갖게 된다. 자신이 설립한 수녀회가 ‘성모성심수녀회’라는 명칭을 갖고 있는데 한국에서 처음으로 ‘성모성심 신심’이 시작된 수리치골을 알게 됐으니 그곳은 발굴해 보호하고 성역화해야 할 거룩한 곳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역사에서 잊혔던 수리치골을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수집한 여러 자료들은 주소지가 계속 바뀌면서 수리치골이 어디인지를 파악하기 어렵게 했고 그곳을 찾는 순례자도 없었기에 더욱 그 자취나 흔적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정행만 신부는 1985년 7월 17일부터 여러 차례 현장을 답사하여 그곳을 면밀히 조사하고 현장을 잘 알고 있던 이들의 증언을 두루 청취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당시 한국천주교회사 분야의 권위 있는 학자였던 이원순 교수(에우세비오, 1926~2018)와 가톨릭신문팀의 도움을 받으며 지역을 탐색한 결과 수리치골의 정확한 위치는 ‘공주군 신풍면 봉갑리’(현재 충남 공주시 신풍면 용수봉갑길)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후 한국교회사연구소 주최로 교회사 학자 8명 등과 함께 진행한 학술 세미나 ‘한국교회의 성모성심 신심과 수리치골’(1988년 7월 14일)에서 수리치골이 어디인지에 대한 학술적 고증이 이뤄졌고, 이후 당시 대전교구장이셨던 경갑룡(요셉) 주교로부터 허락을 받아 성지 개발에 착수했다.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1984년 2월 2일 설립 교령을 받아 정식으로 인준)는 2012년 5월 수원교구에서 대전교구로 이전하면서 설립자의 유지를 받들어 본격적으로 성지 개발에 매진했고, 2015년 12월 23일에는 수리치골 성지가 성모님과 관련된 교회사적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는 교령을 수여받았다. 이 교령을 통해 ‘수리치골 성지’는 ‘수리치골 성모성지’로 명칭을 수정하게 됐다.

2016년 11월 1일, 수리치골에서 성모성심회가 발족된 지 170주년을 기념하면서 ‘성 다블뤼 안토니오, 조선교회 봉헌과 성모성심회 설립 170주년’이라는 주제로 학술 발표회를 개최했다.당시 대전교구 총대리 김종수(아우구스티노) 주교가 기조 강연을 맡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조현범(토마스) 교수와 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정환(요한 세례자) 신부 등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어 당시 대전교구장 유흥식(라자로) 주교(현 추기경)의 주례로 감사미사가 봉헌됐다. 이 연구들을 근간으로 이후 수리치골 성모성심회 발족터 권역 정리 및 안내판 설치가 이뤄졌다. 2023년 11월 1일에는 대전교구 총대리 한정현(스테파노) 주교 주례로, 수리치골 성모성지 내 성모칠고상과 성모성심회 발족터 축복식이 거행됐다.

박해의 무서운 기세가 모두를 위협하며 교회를 할퀴고 지나가도, 결코 훼손되지 않는 인간의 신앙과 신념은 자신들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토록 하는 놀라운 응집력을 양산시킨다. 아무리 훼손해도 폐허가 되지 않는 기적이 신앙의 신비이며 은총인 것이다.

수리치골 성모성지는 성모성심께 한국교회의 운명과 고통받는 인간의 존엄을 봉헌한 곳이다. 부디 한국 신자들이 이곳에서 자신들의 어려움을 성모님께 의탁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빛과 생명으로 다시 살아낼 힘과 존엄을 회복하는 충만한 은총을 체험하기를 기원한다.

글_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김혜윤(베아트릭스)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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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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