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가 ‘나’라고 말하는 시대, 우리는 무엇으로 인간인가. 대만의 IT 전문가이자 평신도 신학자 탄량천(談良辰) 교수는 이 물음에 대해 자신의 삶으로 답하는 사람이다. 업계에서 20년간 성공을 쌓았지만, 무너진 건강과 가정 앞에서 성취로는 사랑을 얻을 수 없음을 배웠다.
이후 20년, 토마스 아퀴나스와 하이데거, 중국 철학을 넘나들고 생태 농업을 일구며 그가 다다른 답은 하나다. 인간은 계산하는 지능 이상의 존재, 몸으로 아파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
성숙한 민주주의와 첨단 산업의 번영, 그 이면의 저출생과 세속화, 청년층의 불안까지 한국과 꼭 닮은 이웃 나라 대만. 천주교 전래 400주년을 맞은 대만교회의 지성에게 AI 시대에 지켜야 할 인간다움과 교회가 여는 만남의 길을 물었다.
Q. 교수님께서는 IT·시스템 통합 기업 ‘칭위안과학기술주식회사(擎願科技股份有限公司)’를 창립해 오랫동안 업계에 몸담으셨다가 철학·신학자의 길로 들어서셨는데요. 그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A. 열여섯 살 무렵 화면 속 빛 막대 하나를 움직이려고 밤새 프로그래밍에 매달렸어요. 그렇게 들어선 IT 업계에서 큰 성공을 얻었지만 과로로 건강도, 결혼생활도 무너졌습니다. 일을 그만두고 쉬던 때, 제게 세례를 준 목사님을 따라 성경 읽기와 기도, 묵상을 처음부터 다시 배웠어요. 그제야 삶의 의미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성취에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죠.
1년간 가족을 위해 기도한 끝에 아내와 두 딸도 세례를 받았고, 2년 뒤 저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학기마다 신학원 수업을 들은 것이 신학의 시작이었어요. 2009년 성모님 체험 뒤 온 가족이 천주교 신자가 됐고, 공부는 신학 석사에서 철학 박사로 이어졌습니다. 기술업계 20년, 공부 20년 끝에 2025년 푸런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Q. IT 현장 경험과 철학·신학 소양을 겸비해, AI에 관한 교회 가르침을 깊이 해설할 수 있는 대만의 유일한 평신도 지식인으로 꼽히십니다. 지금 어떤 연구를 하고 계시죠?
A. 박사논문 주제를 ‘존재와 인식’으로 정하자 지도교수님이 “이미 수많은 사람이 연구한 주제인데 무엇을 새로 밝히겠느냐”고 하셨어요.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죠. 2년간 그리스 고전과 고대 그리스어까지 파고든 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식론으로 인간이 피조물을 인식하며 어떻게 하느님을 발견하는지 분석했습니다. 지금은 AI 시대에 영성으로 인간의 주체의식을 어떻게 강화할지, 그리고 성경신학 박사과정 논문 주제인 바오로 사도의 ‘새 창조’ 신학을 연구합니다. 두 갈래는 결국 ‘하느님의 모상’에서 만나리라 봅니다.

Q. 토마스 아퀴나스와 하이데거, 중국 사상과 그리스도교의 만남을 두루 연구해 오셨습니다. 한국 독자에게 다소 낯선 중국 사상, 그리고 신앙과 잇기 어렵다고들 하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은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사유의 지평을 열어 줄까요?
A. 그리스 철학에 바탕을 둔 서양 신학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는 영혼의 기나긴 여정의 종착점이지만, 중국 사상에서 천인합일(天人合一)은 출발점이에요. 인간의 도리가 하늘의 도리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데서 삶과 수양을 시작하죠. 한국도 유교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니 공감하실 거예요.
제가 존경하는 가톨릭 영성가 우징슝(吳經熊) 박사는 공자의 생애를 그리스도교 영성의 정화·조명·일치 세 단계로 읽었어요. “일흔 살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논어-위정편」)”는 공자의 경지가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는 나무”(시편 1,3)와 같다는 거죠.
「중용」은 “성실함 그 자체는 하늘의 도리이고, 성실함을 이뤄가는 것은 인간의 도리(誠者,天之道也;誠之者,人之道也)”라고 말합니다. 앞의 것은 하느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의 신성이고, 뒤의 것은 그 진리를 살아 내신 그리스도의 인성이에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도리와 인간의 도리는 하나가 되고, 우리는 자신이 하느님의 모상임을 깨닫습니다.
마음을 밝혀 본성을 본다는 중국 불교의 ‘명심견성(明心見性)’도 결국 이 모상을 보는 일이죠. 여기서 견(見, 보임)을 현(現, 드러남)으로 읽으면 하이데거와 만납니다. 그는 가려진 ‘존재’가 스스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고 말하죠.
모든 가림은 자아의 위장이죠. 복음도 역사와 번역, 우리의 편견에 가려지곤 하는데, 그 가림을 걷어 내는 법을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습니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은 민족적 편견과 혈통의 자부심, 욕정, 종교적 이념에 눈이 가려져 있었어요. 예수님께서는 단죄 대신 대화로 여인이 한 겹씩 가림을 벗고 참된 자신을 알아 가도록 도우셨습니다.
Q. 「AI 기술 진화의 시대,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AI科技演化時代,人往哪裡去?, 국내 미출판)」에서 ‘지능’과 ‘지혜’의 차이, 그리고 인간의 ‘육신’과 ‘만남’을 강조하셨는데요.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은 무엇일까요?
A. 강연마다 “AI가 언젠가 인간 같은 의식을 갖게 되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상당수가 “그렇다”고 답하더군요. AI가 ‘나(我)’라고 말하면 우리는 그것이 자의식을 가졌다고 착각하죠. 그 저변에는 의식을 뇌와 신호, 곧 물질과 수학으로 환원하는 유물론이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인간 정신이 자신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서 하느님의 모상을 보았어요. 지능은 이해하는 능력의 한 표현일 뿐이죠. 그래서 책에서 ‘사랑의 지혜’를 따로 다뤘습니다. 물질이 의식을 낳을 수 있다는 믿음은 ‘하느님처럼 되려는’(창세 3,5 참조) 오랜 유혹의 새 얼굴이에요. 사랑은 몸에서 시작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경계하신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은 육신의 나약함을 ‘해결할 문제’로만 간주하고, 생각만 기계에 옮기면 죽지 않으리라 상상하죠.
한 학술대회에서는 AI가 “인간은 죽지만 AI는 죽지 않는다”고 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죽음을 모르는 AI는 전쟁에서 이기려고 인간의 생명도 서슴없이 희생시킬 수 있습니다. 인간은 제 몸의 아픔으로 남의 아픔을 헤아리기에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마태 22,39)할 수 있죠. 교회는 이 만남의 문화를 AI의 설계와 활용 안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Q. 생태신학을 연구하며 ‘량천유기농장(良辰有機農場)’을 세우고 비유전자변형 농산물 운동에도 참여하셨죠. 생태를 교수님 신앙의 핵심 문제의식으로 가져오신 계기가 궁금하네요.
A. 2014년 석사 논문을 쓰던 중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너도 했느냐?”는 부르심에 응답해 유기농업을 배웠습니다. 어느 날 들판에서 저를 한결같이 바라보는 유기견 출신 반려견 ‘헤이슝(黑熊)’을 보며 “너는 이 아이처럼 나를 바라보느냐?”라는 주님의 물음을 들었습니다. 그때 제 신앙에 동·식물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이 생태신학의 출발점이 됐죠. 유기(有機)는 만물이 저마다 제 모습으로 존재하도록 하는 생명의 태도입니다.
농장을 세워 ‘닭·채소 공생(雞菜共生)’이라는 순환 체계를 만들었죠. 온실 10동 가운데 3동에서만 채소를 기르고, 쉬는 온실에는 닭을 풀어놓습니다. 그러면 닭들이 잡초와 해충을 먹고 흙을 일구고 거름을 줘요. 그 바탕에는 땅을 쉬게 하는 ‘안식’이 있습니다.
Q. 2012년 성공회에서 천주교로 옮기셨고, 지금도 성공회 신학원 ‘삼일서원(三一書院)’에서 가르치고 계시는데요.
A. 성공회가 저를 끌지 못한 것도, 천주교가 저를 끈 것도 아닙니다.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를 이끄셨습니다. 완고했던 입장이 성모님 체험으로 무너졌고, “일치를 위한 나의 종이 되어 나를 위해 목소리를 내어라”라는 부르심을 들었어요. 성경·전통·이성·경험을 균형 있게 존중하는 성공회의 신앙 특색은 천주교의 영적 보화이기도 하잖아요? 결국 교황님을 중심으로 한 전통을 찾아 성 존 헨리 뉴먼 추기경님의 길을 따랐죠. 삼일서원에서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성경을 함께 활용하며 학생들이 두 전통의 언어에 익숙해지도록 가르칩니다.

Q. 대만교회의 역사와 신앙 자산을 소개해 주세요.
A. 올해로 천주교 전래 400주년을 맞은 대만교회는 오랫동안 ‘받는 교회’였어요. 식민 시대 선교사들은 신앙과 함께 의료와 교육을 들고 산속 부족 마을까지 들어갔죠.
하지만 첨단 산업과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룬 오늘의 대만에서 사제가 모든 일을 도맡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신자는 인구의 1~2이고 민간신앙이 깊이 뿌리내린 땅이지만 이를 계속 ‘이방인의 신앙’으로만 볼 수는 없어요.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토양을 식민 시대의 눈으로 재단하지 말고, 평신도가 은사를 발휘해 이웃 종교와 사회 속에서 대화하며 함께 걸어야 합니다.
이주민 2세들이 지역 교회에서 봉사하기 시작한 지금, 대만교회는 다양한 이들이 함께 논의하고 함께 걷는 법을 배우는 중이죠. 한국보다 다문화에 더 열린 사회라, 교회는 작아 보일지 몰라도 그 작음이 오히려 만남의 문을 엽니다.
작다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겨자씨 같은 믿음이 있느냐가 중요해요. 사제 중심에서 하느님 백성 중심으로, 가르치는 교회에서 경청하는 교회로, 지도에서 참여로 바뀌어야 합니다. 오늘의 복음화는 선교에서 만남으로 나아가야 하죠. 젊은이들이 상처와 나약함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께 마음을 열 수 있도록, 열린 공동체를 마련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그 일에 한국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이 많아요. 제가 만난 한국 신부님들은 학식이 깊었고, 박해를 겪고도 겸손하셨죠. 그 열정과 순교 정신으로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에 오는 젊은이들의 마음에 희생과 헌신의 불을 붙여 주십시오. 창간 100주년을 축하드리며,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의 선교 안에 늘 ‘드러나기를(現)’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