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은 한국민의 분노 알아야,
미군 장갑차에 압사한 두 여중생의 죽음에 대해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는 데 대해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이 분노는 사건 발생 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미군과 미국 정부의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자세에 그 근본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이 있으며 그 바탕에는 불평등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이 자리잡고 있다. 아울러 이 문제에 대처하는 한국 정부의 무기력하고 안이한 대응이 국민의 분노를 부채질하고 있다.
11월 30일, 지난 6월 붉은 악마의 함성이 울려 퍼졌던 광화문 네거리는 한 네티즌의 제안에 자발적으로 호응한 1만여 명의 시민들로 뒤덮였다. 한때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에 대해 긍지와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거리는 이날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끝없는 촛불, 그리고 어린 생명조차 지키지 못한 자신들의 과오를 참회하며 깊이 고개 숙인 시민들로 채워졌다.”(가톨릭신문 2002년 12월 8일자 사설)
미군 장갑차에 여중생 2명 압사… 가해 주한미군 모두 무죄 평결
주한미군지위협정 불평등 문제, 시민 참여 대규모 집회로 번져
2002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대중의 역동성과 사회 변혁의 의지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한 해였습니다. 한일 월드컵을 통해 고양된 국가적 자부심과 민족주의적 열정이 광장과 거리의 축제 문화를 형성했고, 이는 곧이어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을 매개로 거대한 사회적 저항 운동으로 전환됐습니다.
6월 13일, 경기도 양주군에서 발생한 미군 장갑차에 의한 신효순·심미선 두 여중생 압사 사건은 한국 사회에 깊은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습니다. 이는 반세기 넘게 지속되어 온 한미 관계의 구조적 불평등과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Status of Forces Agreement)의 독소조항을 드러내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 사건으로 촉발된 SOFA 개정 운동은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단체가 주도하던 전통적 시위 방식을 넘어서,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자발적인 시민 참여와 평화적인 촛불집회라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패러다임을 제시했습니다.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의 불평등성
SOFA 개정 논의는 2002년에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SOFA는 1966년 체결, 1967년 발효됐고, 1991년과 2001년에 두 차례 개정됐습니다. 협정 체결 직후부터 불평등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2001년 개정 직후에도 시민사회와 종교계는 특히 공무 중 범죄의 1차적 재판관할권, 초동수사와 신병인도, 환경·배상 문제에서 여전히 불평등성이 남아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던 중, 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군에서 이동 중이던 미 제2사단 장갑차가 두 여중생을 치어 사망하게 했고, 한국 법무부는 7월 미국 측에 재판권 포기를 요청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11월 20일과 22일 미 군사법원에서 관련 미군 두 명이 모두 무죄 평결을 받으면서 사건은 단순 사고를 넘어 “한국인의 생명과 한국 사법주권이 동등하게 존중되는가”라는 정치적 질문으로 전환됐습니다.
이후 촛불집회는 11월 말 수천 명 규모에서 12월 중순 전국 수만 명 규모로 확대됐습니다. 12월 14일 MBC는 서울 5만여 명, 전국 약 6만 명이 참여했다고 보도했고, 중앙일보는 12월 14일 전국 약 7만 명, 12월 31일 약 10만 명으로 집계했습니다. 규모 집계에는 매체·경찰·주최 측 간 차이가 있으나, 2002년 촛불이 기존 조직 운동을 넘어 청소년·직장인·일반 시민의 네트워크형 참여로 확장된 점은 분명합니다.

광범위한 대응 나선 한국교회, 단순한 이데올리기적 접근 대신
생명·정의·화해 의미 성찰하며 보편적 인권 문제로 담론 확장
천주교회의 역할
이 과정에서 교회의 역할은 특히 중요했습니다. 주교회의는 사건 이전인 2000년 12월과 2001년 4월에 미국 측에 SOFA 개정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했고, 2002년 12월 5일에도 의장 명의의 서한을 미국 주교회의를 거쳐 미 국방부에 보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대응은 사건 이후의 일시적인 반미 대응이 아니라 주권의 평등, 생명권, 정의와 평화, 피해자 보호를 일관되게 결합해 온 기존 사회교리적 문제의식을 이 사건을 계기로 확장한 것이었습니다.
각 교구에서도 광범위한 움직임이 이어졌습니다. 인천교구는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9일 기도, 시국미사, 추모문화제와 항의집회를 진행했고,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사진전과 1만 5천 명 이상 서명운동, 안동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시국미사·성명·거리 사진전, 대구 지역 가톨릭 청년단체는 추모미사와 모금·서명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특히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문정현(바르톨로메오) 신부 등은 범시민 SOFA 개정운동과 직접 연대하면서 종교적 의례와 공간을 시민운동과 연결하고 ‘반미(反美)’ 프레임을 ‘생명·정의·평등한 한미관계’ 프레임으로 전환시켰습니다.
가톨릭신문은 SOFA 개정 운동과 관련된 교회 안팎의 움직임을 빠짐없이 다루고, 특히 사설을 통해 SOFA의 불평등성을 지적하고 개정을 촉구했습니다. ‘SOFA 개정 더 미룰 순 없다’(2002년 8월 11일자)에서는 책임자 처벌과 협정 전면 개정을 요구했고, ‘SOFA 개정 촉구 9일 기도’(2002년 9월 8일자)는 인천교구 9일 기도의 의미를 성찰했습니다. 또한 ‘미국은 한국민의 분노를 알아야’(2002년 12월 8일자)는 미국과 한국 정부의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태도를 각각 비판하며 국민적 분노를 대변했습니다.
인간 존엄성과 주권 국가의 권리
2002년 두 여중생의 죽음으로 촉발된 한미 SOFA 개정 운동은 단순히 주한미군의 특권적 지위에 대한 반발이나 배타적 반미주의의 발로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는 냉전 이데올로기와 국가 안보라는 거대 담론에 짓눌려 무비판적으로 유보되어 왔던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주권 국가의 자존심’을 되찾고자 하는 범국민적인 자각이었습니다.
특히 천주교회는 SOFA 문제를 주권 분쟁에서 ‘생명·정의·화해의 조건’이라는 도덕적 문제로 확장했습니다. 교회는 1970년대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 사건을 단순한 반미 감정의 표출이 아닌 인간의 존엄성 회복과 주권 국가 간의 평등한 평화 구축이라는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 승화시켰던 것입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