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같은 당선이었다. 지난주, 브라질 대통령 선거 2차 투표를 앞두고 리우데자네이루의 코파카바나 해변에는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여들어 민주주의를 지켜 내자는 시위를 벌였다. 이 선거는 단순한 정치적 의견 차이를 훨씬 넘어, 40년 전 민주주의가 회복된 이후 브라질 시민이 쟁취한 중요한 성과와 권리를 지키는 일이었다.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 평생을 투신한 철강 노조 출신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와 극우 정치의 표본 같은 플라비우 보노소나루는 1차 투표에서 모두 과반을 득표하지 못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룰라의 선거 패배가 곧바로 주권 상실과 파시즘으로 이어진다는 위기의식으로, 학생들을 비롯해 수많은 시민이 대규모 행진을 벌이고 소셜미디어 캠페인으로 브라질의 극우화를 막아낸 것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반드시 군사 쿠데타나 독재 정권의 폭압으로부터만 오지 않는다. 우리도 2024년 12월 내란 사태 이후 겪고 있는 일이지만,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정치세력이 민주주의의 제도와 규범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리면서 위기가 시작된다. 이 위기는 불평등과 격차를 향한 비뚤어진 욕망을 안에 품고, 포퓰리즘과 능력주의 같은 이념을 연료로 삼아 극심한 내부 분열을 일으키며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단순히 나쁜 정치인의 등장이나 시민들의 정치적 판단 착오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성장이 사회적 분배와 실질적 평등을 보장하지 못하고, 민주주의 제도가 시민들의 구체적인 삶을 개선하지 못한 결과, 사회적 불만과 불안이 극우 정치에 동원되는 구조적 위기다.
브라질의 선거는 민주주의가 직면한 위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례다.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다. 불평등과 착취가 지속되고 사회적 연대가 약화되면, 제도적 민주주의가 유지되더라도 그 안에서 자라나는 것은 극우주의다. 성장이라고 부르는 과정이 실제로는 사회적 해체와 불평등을 확대한다면, 민주주의의 위기는 예외적인 일탈이 아니라 그 성장 모델 자체 안에 있는 것이다. 동시에 룰라의 승리는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연대가 위기를 극복하는 데 얼마나 소중한 역량인지도 알려준다.
민주주의의 회복 가능성은 결국 시민들이 어떤 사회에서 살기를 원하는가에 달려 있다. 불평등과 불안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권력과 돈을 숭배하는 무모한 지도자의 통치에 의존하는 사회인가, 아니면 모든 사람의 존엄과 참여를 보장하며 공동의 제도를 재구성하는 사회인가?
민주주의를 회복한다는 것은 단지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정치세력을 선거에서 패배시키는 것이 아니다. 시민들이 한낱 권위와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온전하고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인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브라질이 보내는 경고는 민주주의의 붕괴가 언제든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실패하고 있는 그 사회적 현실부터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1989년 신학자 이냐시오 엘라쿠리아 신부는 브라질과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했던 엘살바도르에서 미국이 사주한 군부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죽음에 맞선 생명의 투쟁이며, 생명을 빼앗아 가거나 죽음을 초래하는 힘에 맞서 생명을 추구하는 일’이라고 했다.(「인권의 역사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하느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이 근본적으로 평등하다고 선언했을 때, 공의회는 초기교회의 전통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들도 동시에 받아들였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삶에 필수적인 중요한 ‘혜택’을 산출하는 정치 질서이지만, 또한 많은 것을 요구하는 정치적 이상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통치 형태여야 한다. 민주주의란 대다수 사람이 ‘죽음에 이르도록’ 겪고 있는 부당한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수많은 사람이 빈곤과 실업 때문에 실질적으로 ‘좋은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데, 공허하게 ‘민주주의의 성취’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필요한 것은 하나이다. 사람의 삶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글 _ 박상훈 알렉산데르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