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만날 수 있는 접점은 자비다.
사진은 2010년 수원가톨릭대 신학생들이 서울 조계사에서 스님에게 불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
평화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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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慈悲)는 불교에서 유래된 개념이다. 자(慈)는 다른 이에게 기쁨을 주고, 비(悲)는 다른 이의 슬픔을 덜어준다는 뜻을 지녔다.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부처의 마음을 가리키는 불교의 핵심 덕목이다.
성경에도 자비가 적지 않게 등장한다. 구약(185번)과 신약(60번)을 합쳐 모두 245번이 나온다. 사랑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고 봐도 무방하다. 성경에 나오는 자비의 어원은 어머니 자궁이다. 어머니만이 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랑이 자비다. 이처럼 자비는 사랑이 갖는 여러 속성 가운데 특별히 무조건적 자애로움을 강조한 것이다.
자비(사랑) 또한 그리스도교의 핵심 덕목이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의 자비와 불교의 자비, 어떤 점에서 다르고 또 어떤 점에서 만날 수 있을까.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존재를 믿는 데 반해 불교에는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느님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은 상황에서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는 명제는 더더구나 의미를 지니질 못한다.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같은 자비를 강조하지만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자비로워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인간을 창조하고 구원하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 수가 없다(1요한 4,8). 인간은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 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 하느님과 하나 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랑으로 보여주셨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랑(자비)만이 인간을 구원으로 이끈다.
사랑의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 자비를 강조하는 것은 어떤 배경에서일까.
불교의 핵심은 무아(無我) 사상이다. `나`라고 여길 수 있는 실체는 없다는 뜻이다. 나뿐만 아니라 영구불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불교의 구원은 무아를 깨닫는 것이다. 고통 덩어리인 `나`는 애당초 없다는 것을 깨달아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표다.
자비는 무아 사상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무아를 깨달으려면 자기 자신에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개인적ㆍ소극적 윤리를 사회적ㆍ능동적으로 전환시킨 것이 자비의 윤리다. 무아 사상에서는 나와 다른 사람이 동등한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 자비를 실천하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무아의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기 위함이다.
흔히 불교를 소승과 대승으로 나눈다. 특별히 이러한 자비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은 대승불교다. 불교는 개인적 깨달음〔自利〕과 타인을 위한 헌신〔利他〕을 완전히 구분하지는 않는다. 다만 소승불교가 속세를 떠난 개인적 수행에 비중을 둔다면 대승불교는 깨달음과 더불어 자비를 통해 현실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데 힘을 쏟는다. 보살은 이러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완전한 조화를 이룬 이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나 불교에서나 자비(사랑)는 구원을 위한 최고의 실천 윤리다. 구원을 얻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점은 두 종교 모두 같다. 그러나 자비를 실천해야 하는 이유와 배경은 크게 다르다.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전제로 하는 세계관은 너무나 달라 두 종교가 교리적으로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자비를 매개로 얼마든지 만날 수 있고 또 세상에 기여할 수 있다. 자비가 넘치는 세상을 기원해본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