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42년 마타티아스의 둘째 아들 시몬은 셀레우코스 왕조 데메트리오스 2세와 조공 면제 조건으로 화친을 맺고 실질적인 유다 독립을 이룹니다. 유다인들은 시몬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추대합니다. 이때부터 마카베오 가문의 ‘하스모네아 왕조’가 시작됩니다. 하스모네아는 마카베오 항전의 시조인 마타티아스 사제의 아버지 하스메네오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카베오와 하스모네아는 한집안을 일컫는 2개의 다른 이름입니다. 마카베오는 독립 항쟁의 때, 하스모네아는 실질적인 독립 왕국을 가리킬 때 사용했습니다.
기원전 134년 시몬과 그의 아들들이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살해당합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몬의 사위로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7세와 공모해 이들을 예리코에서 암살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게제르 요새를 지키던 시몬의 다른 아들 요한도 죽이기 위해 암살자들을 보냈으나 실패하고 맙니다. 요한의 암살을 실패한 프톨레마이오스는 왕위 찬탈의 꿈을 접고 지금의 암만인 필라델피아로 도망쳤습니다.
반면, 화를 면한 요한은 자신을 예루살렘 백성과 군대의 지도자로 선포하고 임금이 됩니다. 하지만 당시 많은 유다인은 하스모네아 가문이 다윗의 핏줄이 아니기에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유다인들의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습니다. 마카베오 가문, 곧 하스모네아 왕조는 거듭된 부패와 분열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지와 신망을 지속해서 잃고 맙니다.
진정한 하스모네아 왕조의 시작은 요한 히르카노스 1세 때부터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전쟁을 펼쳐 유다의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그는 기원전 128년 사마리아인들의 그리짐 산 성소를 파괴했고, 유다 남쪽에 살던 에돔인, 곧 이두매아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다 항쟁의 시조인 마타티아스처럼 유다교에 충실하게 살아온 이들을 소집해 함께 전쟁을 치른 것이 아니라 용병들을 이끌고 정복 활동을 펼쳤습니다. 유다인들이 볼 때 그는 세속의 지배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하스모네아 왕조를 지지하던 바리사이들도 등을 돌렸습니다. 요한 히르카노스 1세는 기원전 104년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요한의 아들 아리스토불로스 1세가 뒤를 이어 임금이 됩니다. 요한 히르카노스 1세는 본래 대사제직을 아리스토불로스에게, 정치권력은 아내와 다른 아들들에게 나눠 줬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불로스 1세는 어머니를 몰아내고 세 동생을 감금하고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는 갈릴래아를 회복하고 이곳에 살던 이투래아인들에게 할례와 유다의 율법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통치 1년 만에 숨졌습니다.
아리스토불로스 1세가 죽자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 살로메는 시동생 알렉산드로스 얀네오스를 감옥에서 풀어주고 그와 결혼해 그를 왕좌와 대사제직에 앉힙니다. 바리사이들은 살로메의 이러한 행동을 비난했습니다. 얀네오스는 다윗의 후손이 아니었고, 대사제가 과부와 결혼하는 것은 율법(레위 21,13-14)을 어기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얀네오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복 활동을 펼쳐 다윗 시대만큼 영토를 넓힙니다. 그는 점령지 주민들을 잔혹하게 대했습니다. 이에 반란과 폭동이 이어졌습니다. 많은 바라사이가 반란에 동조했습니다. 얀네오스의 복수는 잔인했습니다. 800여 명의 반란자를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습니다. 이러한 형벌은 이스라엘 역사상 없었던 일입니다. 잔혹한 공포 앞에서 누구도 공개적으로 얀네오스를 반대할 수 없었지만, 수많은 유다인이 그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76년 얀네오스가 죽자 알렉산드라 살로메가 통치했습니다(기원전 76~67). 살로메는 정치 실권만 갖고, 아들 요한 히르카노스 2세에게 대사제직을 넘겨줬습니다. 율법에 따라 여자가 대사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살로메가 하스모네아 왕조를 통치하던 시절 셀레우코스 왕국이 멸망했고, 로마군은 소아시아 동쪽에서 전쟁을 치르느라 비교적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알렉산드라 살로메가 죽은 뒤 장남 히르카노스 2세가 기원전 67년 임금이 됩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동생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사두가이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을 공격해 히르카노스 2세를 몰아내고 임금이 됩니다. 이때부터 형제들의 무력 충돌이 이어집니다. 히르카노스 2세는 이두매아 총독 안티파테르에게 도움을 청했고, 안티파테르의 권고를 받아 나바테아인들의 지원도 청해 예루살렘을 공격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히르카노스 2세와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서로 로마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했습니다.
기원전 63년 로마 집정관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공격해 1만 2000여 명의 유다인을 학살하고, 성전 지성소까지 들어가 성전을 모독했습니다. 아리스토불로스 2세와 아들들은 로마로 끌려갔습니다. 로마의 지지를 얻은 히르카노스 2세는 다시 대사제와 영주로 임명되지만(기원전 63-40), 임금이라는 호칭은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유다는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마카베오 가문에 의해 시작된 유다인 독립 왕조는 이렇게 70년을 넘기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여기서 실속을 챙긴 사람은 히르카노스 2세를 지지했던 안티파테르였습니다. 안티파테르는 헤로데 대왕의 아버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