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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학생 시절 차동엽 신부. 당시 차 신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유학 시절에도 기숙사 방 한쪽에 전기밥솥을 두고 현미밥을 챙겨 먹어야 했다. |
차동엽 신부를 유명 포털사이트에서 보통 이렇게 소개한다.
“차동엽(車東燁, 1958년 5월 31일~2019년 11월 12일)은 대한민국의 가톨릭 사제이며, 세례명은 노르베르토. 그는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 77학번으로, 1981년에 학사 졸업하였고 해군 학사장교 72기 출신이며,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봉직하였다. 2019년 11월 12일 새벽에 간암으로 선종했다. 향년 61세.”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에서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가 집필한 「무지개 원리」는 베스트셀러로 수백만 권이 팔렸다. 대표적인 가톨릭 스타강사였던 차동엽 신부는 교계 방송은 물론 공중파 TV에도 나가서 재미있는 강의를 시청자들에게 선사했다. 지금은 강의가 TV서도 많이 나오지만, 당시에는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로만 칼라를 하고 대중들에게 대놓고 교리나 성경을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이용했고 강의 속에는 항상 신앙과 희망, 사랑이 녹아있었다. 본 편은 그리운 친구 차동엽 신부와 실제 했던 대화로 구성해보았다.
허영엽 신부(이하 허 신부) : 우리가 만난 것이 빈에서였지요?
차동엽 신부(이하 차 신부) : 네. 1988년 오스트리아 빈 신학교에서였지요. 그땐 20대 후반의 꽃다운 나이였죠. (웃음) 나는 서울대 대학원을 다니다 늦은 나이에 신학교에 들어와 유럽으로 갓 유학 온 신학생이었고 허 신부님은 이미 4년 차 신부였죠.
허 신부 : 신부와 신학생이었지만 첫 만남서부터 촉(?)이 왔어요.(웃음) 그래서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죠. 그러면서도 우리는 서로에게 존댓말을 했어요. 서로 진짜 존중한다는 의미로 존댓말을 했던 것 같아요. 그때 사실 나는 다른 동창을 만나러 갔다가 그 친구가 없어 신부님을 만나게 됐어요. 그것도 참 우연은 아닌 것 같아요.
차 신부 : 신부님이 좋아하는 노래, ‘만남’에 그런 가사 나오잖아요? 둘 다 술도 잘 못 마시고 수다 떨기(?)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특별히 공동 주제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건강 때문이었죠. 전 아주 어릴 적부터 비탈길에서 연탄 같은 등짐을 많이 졌었고, 먹는 것도 부실해 몸이 많이 안 좋았던 것 같아요.
허 신부 : 전 모든 형제자매가 이상하리만치(?) 튼튼한데 저만 어릴 때부터 병치레를 많이 했어요. 사실 신학교에 들어와서도 중간에 건강 때문에 그만둘 뻔한 적도 있었고요. 고등학교 때 앓았던 폐결핵이 재발해 대신학교 2학년 때 신학교에서 나오게 되었어요. 전염병에 걸리면 공동생활을 하는 기숙사에서 당연히 나오는 거죠. 그때 전 성소를 접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내가 나가는 날 전날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어 계엄령이 발동되어서 모든 학생이 다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신기해요.
차 신부 : 맞아요. 저도 우여곡절 끝에 인천교구 신학생으로 입학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서울대교구 신학생이 되었으면 많이 달라졌을 거로 생각해요.
허 신부 : 그런데 신부님은 해군 사관 후보생 훈련 기간 중 작은 체구임에도 어떤 훈련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수한 훈련성적으로 졸업했다고 들었어요. 훈련 동료들이 ‘차돌이’라고 불렀다면서요?(웃음)
차 신부 : 그땐 한창 젊은 나이니까 깡으로 버텼어요. 작다고 누구한테 지고 싶지 않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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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영엽 신부와 차동엽 신부가 가톨릭회관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허 신부 : 차 신부님을 생각하면 빈에 있는 북한 식당에 간 것이 늘 기억나요. 오스트리아는 중립국이라 북한과 수교가 있었고 북한 식당도 시내에 있었지요. 사실 당시에는 외국에 나가려면 꼭 장충단 공원 위쪽에 있는 반공센터에서 관련 교육을 이수했잖아요? 그 강의 때 북한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은 절대 가지 말라는 분위기로 이야기하죠. 자칫해서 안기부(지금 국정원)에서 알게 되면 처벌받는다고 엄포도 줬고요.
차 신부 : 그런데 제가 아마 다른 한국 학생들에게도 북한 식당에 한번 가보자고 했더니 허 신부님도 구미가 당기는 듯 “한번 가보죠, 뭐” 하셨어요.
허 신부 : 우리가 북한 식당에 들어갔을 때 다른 사람들은 거의 없었죠. 상당히 깨끗하고 큰 식당인데 선입견 때문인지 으스스했지요.(웃음) 젊은 남자 종업원이 와서 독일어로 “뭐 주문하십니까?” 했을 때 차 신부님이 호기롭게 “같은 한국 사람인데 한국말로 하시지요?” 했어요.
차 신부 : 전 그건 기억나지 않고 그 종업원이 아주 유창하게 독일어를 했던 것이 기억나요.
허 신부 : 그럼 그때 사실 독일어를 잘 못 알아들어서 그랬던 건가요? 우리가 음식을 시키고 그 종업원이 커튼 친 주방 쪽으로 가서는 모습을 한참 안 보였어요. 우리는 유난히 조용한 주위를 돌아보면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지요. 그러자 한 신학생이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 이러다 납치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차 신부님의 말에 모두 웃음이 터졌지요.
차 신부 : “이 사람들이 바봅니까? 우릴 데려다 어디다 써요. 정보도 없고 차비랑 밥값만 들어가지요!”(웃음)
허 신부 : 그날 처음 북한 식당에 가서 식사했을 때 아주 맛있었고 나중에는 그 종업원도 우리에게 경계를 풀고 잘해주셨던 것 같아요.
차 신부 : 저는 사실 빈에 있으면서 그다음에도 그곳에 여러 번 갔었어요.(웃음)
허 신부 : 내가 차 신부님 신학교 숙소에 갔을 때 눈에 먼저 보인 것이 구석에 두었던 밥솥이었어요. “이 밥솥에 직접 식사도 지으세요?” 하니까 현미밥을 하루에 한 번은 지어먹는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책꽂이에도 보니까 조금 과장해서 독일어 서적보다 한국에서 가져온 건강에 관한 서적이 많았어요. 그래서 제가 이것저것 물어보면 전문가 이상으로 설명을 잘해주시고, 건강을 유지하는 법을 열강(?)하곤 했어요.
차 신부 : 건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 다른 사람들 반응은 시큰둥하죠.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사람들은 다 건강하고 아픈 적이 드물었으니까요. 아파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픔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죠.
허 신부 : 사실 그때 신부님 방 구석에 작은 밥솥을 보고 눈물이 나오는 것을 많이 참고 일부러 웃기는 이야기를 많이 했죠.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하잖아요. 신부님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다 알고 느낄 수 있었어요.
차 신부 : 신부님에게 특히 고마운 건 빈에 오면 우리를 한국 식당에 데려가 밥을 사준 거예요. 제가 나중에도 사람들에게 그랬죠. 살면서 제일 고마운 건 배고플 때 밥을 사주는 사람이라고요. 저희가 굶지는 않았지만 사실 비싼 한국 식당에 가서 한식을 마음대로 먹을 순 없었을 때니까요. 그리고 신부님이 빈을 떠날 때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빈 역에 배웅했는데 항상 흰 봉투를 내 주머니에 찔러주었어요. 처음에는 ‘같은 유학생끼리 힘들 텐데’ 싶어서 안 받으려 했는데 “나중에 다른 후배에게 갚아요”하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그다음부터는 당당하게(?) 받았어요.(웃음)
허 신부 : 어릴 때부터 간이 안 좋았다는 신부님의 외국 유학 생활은 다른 분들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을 거로 생각했어요, 신부님 말대로 매일 기도하지 않으면 못 버틴다고 하셨죠. 늘 한결같이 옆집 아저씨 같은 느릿느릿한 말투나 몸짓과 함께 특별한 유머 감각이 있어서 어려움을 잘 견디셨을 거예요. 신부님 말대로 한국에서 매일 밤새워 기도해주는 어머니의 기도 원조가 가장 큰 힘이라 하셨죠.
<계속>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