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 <7>알퐁소 김택규 대표
| ▲ 알퐁소 김택규 대표가 작업공간에서 자신의 삶을 풀어놓고 있다. |
| ▲ 알퐁소 매장 1층 진열대. |
| ▲ 당시 주교였던 염수정 추기경(왼쪽)과 김택규 대표 부부. |
| ▲ 김 대표가 박귀훈 신부의 요청으로 처음 만든 등산화. |
마음에 드는 신발을 사서 신었을 때 신발이 발에 딱 맞는 데다 편하기까지 하면 그보다 기분 좋은 일은 없다. 좋은 신발이란 비싼 신발, 예쁜 신발이 아니다. 내 마음에 드는 신발이다.
정직이 최고의 삶의 가치라 여기며 평생 정직하게 신발을 만들어 온 이가 있다. 신발을 신고 행복해할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그 신발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신발이다.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는 ‘타인의 삶’. 수제화를 만드는 알퐁소 김택규(알폰소, 89) 대표를 만났다.
알퐁소에서 만난 알폰소
서울 성북구 돈암동 미아리고개에 위치한 알퐁소 매장. 수제화를 만드는 곳답게 매장 안에는 가죽 냄새가 가득했다. 1층에 진열된 신발들을 구경한 지 10여 분쯤 지났을까. 김택규 대표가 웃으며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89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했다. “안녕하세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김 대표가 취재진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의 눈빛은 맑았고 얼굴은 온화했다. 김 대표와 인사를 한 후 그를 따라 2층 작업실로 올라갔다. 2층에 올라가니 가장 먼저 작업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곳에 앉아 50년 넘게 신발을 만들었으리라. 작업공간 옆으로는 한눈에 봐도 오래된 재봉틀이 놓여 있었다. 재봉틀의 주인은 김 대표의 아내 박춘자(사비나)씨다. 벽에 설치된 진열대에는 수선이 끝난 신발들과 주문서들이 빼곡했다. 자신의 작업공간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던 김 대표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맨몸으로 서울 땅을 밟다
김 대표가 취재진에게 물었다. “비참합니다. 내 이야기를 다 할라믄. 그래도 들어볼랍니까?”
김 대표는 군 제대 후 27살에 전남 곡성에서 맨몸으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지금은 빌딩들이 있지만, 그 당시 서울역 앞은 하꼬방(판잣집)촌이었거든요. 가격이 싼 하숙집들이 있었어요. 전국 팔도에서 올라온 별의별 사람들이 거기서 생활했지요. 그런데 그마저도 돈이 없으니까 거기서 살 수 없었어요. 그래서 청계천 수표교 밑에서 생활했지요.” 김 대표는 미군 부대에서 버린 음식찌꺼기로 만든 꿀꿀이죽을 먹고 살았다. “꿀꿀이죽이 호박죽처럼 색깔이 그래요. 근디 그것이 그렇게 맛있어요. 한 두 끼를 굶으면 짜고 매운 것도 달아요.”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순 없었다. 제대로 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연탄공장이 많았어요. 그래서 연탄공장에서 일했는데 모두 다 대우가 좋은 게 아닙디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어렵고 연탄 가루도 많이 마시는 일을 했어요.” 연탄공장에서 일하던 중 김 대표는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준 사람들과 마주하게 된다.
구두통을 둘러메다
연탄공장 사람들은 미군 부대에서 나온 워커를 신고 일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연탄공장에 워커를 수선하러 온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신발 수선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가만히 보니까 잠깐 하는데 돈을 좀 벌더라고요. 그게 가장 자본이 안 들어가고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김 대표는 구두통을 둘러메고 지방으로 내려가 시장과 공사판을 다니며 신발 수선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어느 지방의 한 면사무소에 갔는데 면사무소 직원이 신발 밑창을 갈아달라고 했다. 김 대표의 첫 번째 신발 수선이었다. “신발을 그대로 뜯었어요. 실수라도 하면 신발을 물어줘야 하는데 어떡해요. 그래서 그대로 뜯어서 수선을 해줬지요. 몇 시간이 걸린 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수선을 해줬는데 고맙다며 돈을 주는데 지금 같으면 몇만 원쯤 됐던 것 같아요.” 처음 느끼는 희열이었다. 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김 대표는 전라북도 일대를 다니며 2년간 신발 수선을 했다. 구두 수선을 배운 적이 없던 김 대표는 그렇게 기술자가 됐다.
벼랑 끝에서 만난 하느님
2년간 신발 수선을 하던 김 대표는 좀 더 안정된 일을 찾고 싶었다. 그 길로 지방에서 신발 수선하는 일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 일하며 한푼 두푼 모아 재봉틀을 샀고 양화점도 차렸다. 양화점이 잘 돼서 가게도 세 군데로 늘렸다. 하지만 많은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5년 만에 모두 망하게 됐다.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시작하며 김 대표는 다시 일어섰다. 그런데 또다시 많은 빚을 떠안게 됐다. 당시 부동산 붐이 일었는데 빚을 내서 무리하게 뛰어들었다가 부동산 가격이 폭락한 것이다.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생을 마감하기 위해 북한산으로 갔다. 그런데 거기서 박귀훈 신부(서울대교구, 1916~2006)를 만났다. 김 대표 인생의 전환점이자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박귀훈 신부님이 내 모습을 보시더니 ‘여기 왜 왔어. 죽지 마. 목숨은 천하를 줘도 바꿀 수 없다’고 했어요. 그때부터 생각을 고쳐먹고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지요.” 김 대표는 그 후 박 신부를 찾아가 교리교육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다. “언젠가는 성당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박귀훈 신부님을 만나서 천주교 신자가 돼야겠다고 결심했지요. 박귀훈 신부님 덕에 목숨을 건지고 세례를 받고 지금의 알퐁소가 생겨날 수 있었어요.”
신발 수선공, 수제화 장인이 되다
김 대표는 박 신부가 정해준 세례명인 알폰소에서 이름을 따 1974년 미아리고개에 매장을 열었다. 알퐁소에서 하루에 만들어지는 신발은 6~7켤레. 신발을 만드는 일은 발 치수를 재는 것부터 시작한다. 같은 사이즈를 신는다 할지라도 사람마다 발이 다르기 때문이다. “볼이 넓은 사람, 좁은 사람, 발등이 높은 사람, 사람마다 발이 다 달라요. 그래서 길이와 볼에 맞게 제작을 해줍니다. 그러면 신발을 편하게 신을 수 있죠.” 알퐁소에서 만드는 신발은 통가죽을 쓴다. 가죽은 사람 피부와 가까워 방수 기능도 투습 기능도 있다. 또한, 닳게 되면 보통 폐기해야 하는 천 소재의 신발과는 달리 가죽 신발은 밑창을 교체하며 장기간 신을 수 있다. 알퐁소 수제화의 보증기간은 10년이다. 고리가 떨어져도 방수도 안창도 끈도 무료다. “사업제의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싫다고 했어요. 적게 만들어도 질을 높이겠다고 했죠. 그래서 지금까지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김 대표의 수제화는 많은 사람이 찾는다.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해 염수정 추기경, 유흥식 추기경 등 그의 신발을 찾은 사제와 수도자들은 다 셀 수 없을 정도다. 역대 대통령과 정치인 중에도 단골이 많다. 김 대표는 명실공히 수제화 장인이 됐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후회도 많고 잃은 것도 있는데 얻은 것이 훨씬 많아요. 처음에는 불행했지만 박귀훈 신부님 만나고 나서는 행복이 시작됐어요. 인생이라고 하는 건 죽을 때 많은 후회를 남기는데 저는 그래도 천주교 신자가 돼서 열심히 살았구나 생각합니다. 저 같은 고철을 용광로에 끓여서 좋은 물건으로 만들어주셨잖아요. 예전에는 이 세상에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만 있었으면 생각했는데 지금은 내가 최고의 백(back)을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 백이 있잖아요. 그보다 더 좋은 백이 없죠. 세상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도재진 기자 djj1213@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