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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림은 최양업 신부가 경신박해를 피해 3개월간 숨어지내며 마지막 편지를 쓴 교우촌이다. 사진은 CPBC가 제작한 드라마 ‘탁덕 최양업’의 죽림굴 장면. |
불무골불무골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가 1857년 9월 2통의 편지를 쓴 곳이다. 최 신부는 이곳에서 14일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15일 홍콩 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최 신부는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자신이 그동안 수집한 순교자들의 자료들을 그해 3월 25일 조선대목구 부주교로 임명돼 주교품을 받은 다블뤼 주교에게 모두 드렸다고 했다. 다블뤼 주교는 내포에서 조선 교회 순교사를 편찬하고 있었다. 최 신부는 또 같은 편지에서 “올 한 해 동안 저는 2867명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했고, 어른 171명에게 세례성사를 주었으며, 대세 받은 어른 17명에게 세례성사의 보례를 하였고, 181명의 신자를 전교회에 가입시켰습니다. 제 관할 구역의 신자는 모두 합해서 4075명이고, 예비 신자는 108명입니다”라고 알렸다.
최 신부는 리브와 신부에게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의 과감한 사목 혁신으로 교우들이 크게 고무돼 있고, 모두가 주교를 다정한 마음으로 존경한다고 전했다. 덧붙여 조선의 사회 제도와 풍습을 소개하면서 조선으로 파견되는 모든 선교사가 미리 조선에 관해 공부한 후 입국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청했다. “선교사들이 이러한 정보를 미리 받지 못한 채 조선에 오게 되면, 자기의 측근에서 시중드는 복사들 말만 듣고 판단을 그르치거나 그 밖의 그릇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과 신자들에게 많은 해를 끼칠 수 있을 것입니다.”(같은 편지)
최양업 신부가 1857년 9월에 머문 불무골 교우촌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선 여러 견해가 있다. 불무골 교우촌은 일찍부터 전라도 부안 불무골 공소 또는 충청도 예산이나 청양의 한 교우촌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다 1987년 호남교회사연구소 김진소 신부가 「전라도 교우촌 연구- 천주교 전주교구사 연구 자료집 제1집 ‘지명 조사 보고서’」를 통해 현 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불무동이 불무골 교우촌이라고 주장했다. 또 정양모 신부는 「최양업 신부의 사목과 사상」에서 공주 운암 공소 인근에 자리한 충남 공주시 탄천면 불뭇골이 불무골 교우촌이라고 했다.
서종태(신앙문화연구원장) 박사는 「병인치명사적」 진술에 기초해 1868년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한 임 요한 가족이 살던 ‘서천 비인 불무골’을 최양업 신부의 편지 작성지로 보는 게 가장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곳이 내포의 다블뤼 주교 집과 가까우므로 최양업 신부가 여름휴가기에 다블뤼 주교의 순교사 편찬을 도왔을 것이란다.
서 박사의 주장을 토대로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명예소장은 조선 시대 고지도에서 비인현에 불무골이 2곳이 있는 것을 찾았다. 두 곳 모두 페롱 신부의 사목 중심지인 ‘산막골 교우촌’(현 충남 서천군 판교면 금덕길 81번길 119)에서 북쪽 산너머 2.5㎞ 떨어진 곳과 남서쪽으로 약 4㎞ 떨어진 곳에 있었다. 두 곳 모두 답사한 차 소장은 충남 서천군 판교면 흥림리 산 84-1 산골짜기에 자리한 불무골이 최양업 신부가 편지를 쓴 그 불무골 교우촌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발표했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 흥림 저수지가 조성되면서 풍천 임씨가 이주해 집성촌을 이뤘는데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현재 대전교구는 충남 판교면 흥림리 불무골을 최양업 신부가 2편의 편지를 쓴 곳으로 보고 있다.
오두재오두재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가 1858년 10월 3일과 4일 르그레즈와 신부와 리브와 신부에게 편지를 쓴 곳이다. 오두재는 전라도 고산현에 자리한 교우촌으로 알려져 오다가 1987년 김진소 신부에 의해 현 전북 완주군 소양면 오도길 129에 있는 ‘오도재’임이 밝혀졌다. 완주 오두재는 소양면 대흥리에서 고산면 성재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오도치의 남쪽 아래 골짜기 끝에 자리하고 있다. 1879년 기묘박해 때 포졸들이 밀고자 최우돌을 앞세워 전라도에서 사목하던 블랑 신부를 체포하기 위해 진안에서 고산으로 가던 중 오두재 교우촌을 급습했다.(블랑 신부가 리델 주교에게 보낸 1879년 9월 29일 자 편지) 이런 사료를 근거로 전주교구는 완주 대흥리 오두재 아랫마을을 최양업 신부가 1858년에 2편의 편지를 썼던 교우촌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한편, 안동교구에서는 1994년 「안동교구사 자료집 제2집 고문서」를 통해 정양모 신부와 마백락 회장의 주장을 근거로 페롱 신부의 사목 중심지를 ‘상주 산막골’(현 상주시 모동면 신흥리)로 보고, 이곳에서 4㎞ 떨어진 경북 상주시 모동면 수봉2리 오도 마을(오도티)를 최양업 신부가 편지를 썼던 오두재 교우촌이라고 한다. 이곳은 추풍령 인근 상주 모동면에서 충북 영동군 황간으로 넘어가는 오도재 아래 산간 마을이다. 학자들은 이곳이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고개 길목이어서 교우촌이 형성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고 있다.
안곡안곡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가 1859년 10월에 3편의 편지를 쓴 곳이다. 최 신부는 이곳에서 11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12일 리브와 신부에게, 13일 만주대목구장 베롤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최 신부는 리브와 신부에게 “여름철에 장마나 무더위나 농사일 때문에 순방할 수 없는 몇 달 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허가가 있어도 제가 쉴 만한 안전한 장소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여름에는 페롱 신부의 관할 구역으로 가서 안곡이라는 교우촌에서 여름휴가를 지냈습니다”라고 했다. 따라서 안곡은 페롱 신부의 사목지임을 알 수 있다. 페롱 신부의 사목지는 충청도 하부 내포 지역과 경상도 북서부, 강원도 일부 지역이었다.
안곡 교우촌 터는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몇몇 학자는 경북 구미시 무을면 안곡(안실)이라고 주장하나 조선 시대 이곳은 사람의 왕래가 잦은 큰 마을이어서 최양업 신부의 휴식처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게 일반적 견해이다. 또 경북 상주시 모동면 금천2리에 있는 안골을 주목하는 이도 있다. 이곳은 마을이 아니라 골짜기이다. 안곡이 충청도 지역의 한 교우촌이라는 주장도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사목지가 1859년 당시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을 맡고 있던 최양업 신부가 자신의 사목지에서 마땅히 쉴 곳이 없어서 충청도로 갔을 것이라고 한다. 차기진 소장은 프티니콜라 신부가 조선어를 배웠던 ‘내대(안골) 교우촌’(현 부여군 외산면 갈산리)이 안곡일 것이라고 조심스레 추정했다.
죽림최양업 신부는 경신박해(1859~1860년)를 피해 경상도 언양 죽림 교우촌에서 약 3개월간 숨어 지냈다. 그는 이곳에서 모든 것을 주님께 의지한 채 교우들과 함께 생쌀을 먹으며 생활했다. 1860년 9월 3일 리브와 신부, 르그레즈와 신부, 그리고 모든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이 편지가 최 신부의 마지막 편지였다.
일찍이 죽림은 언양 간월산 중턱에 있는 ‘죽림굴’로 알려져 왔고 지금도 부산교구가 순례지로 조성해 많은 순례자가 이곳을 순례하고 있다. 「병인치명사적」에 따르면 언양 죽령(竹嶺)리 교우촌이 있었다. 1868년 울산 장대에서 순교한 복자 이양등(베드로)ㆍ김종륜(루카)ㆍ허인백(야고보)이 죽령리 교우촌에서 체포됐다. 특히 허인백은 죽령리 산중에 집을 짓고 목기를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김구정 선생이 「영남교회사」(1966년)에서 ‘죽령’을 우리말 ‘대재’로 처음으로 옮겨 사용해 지금은 ‘대재 공소’로 더 잘 알려졌다.
최근 몇몇 학자들은 죽림이 최양업 신부의 마지막 편지에 나오는 동정녀 김 아가타의 묘(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등억알프스리 산 209-2)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조심스레 주장한다. 현재 김 아가타의 묘는 살티 순교성지로 이장돼 있다. 최양업 신부는 죽림 교우촌 교우들과 함께 포졸들의 농락을 뿌리치고 피신해온 김 아가타의 임종을 지켜봤다. 이런 이유로 몇몇 학자들은 최양업 신부와 교우들이 김 아가타의 시신을 죽림 교우촌과 가까운 곳에 안장했을 것이라며 김 아가타의 묘가 있던 간월 공소와 멀지 않은 곳에 죽림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