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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티는 첫 조선대목구 신학교가 있던 유서깊은 교우촌으로 최양업 신부는 1853년부터 1856년 여름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사목하고 신학생들을 양성했다. 사진은 복원한 배티 신학교. |
배티에 자리한 조선대목구 신학교
최양업 신부가 책임을 져 배티에서 신학생을 양성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중부고속도로 진천 IC에서 34번 국도를 타고 백곡저수지를 거쳐 구수 삼거리에서 안성 방향으로 서운산 자락을 타고 약 7㎞를 가다 보면 왼편에 배티 성지가 나온다. 도로명 주소로는 충북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13이다.
배티 교우촌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경기도와 내포 지방 그리고 경상도 일원에서 피신한 신자들에 의해 형성됐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조선 후기까지 거의 사람들이 살지 않던 오지인 데다 충청도와 경기도의 접경이어서 박해를 피해 떠돌던 교우들이 숨어 지내기에는 딱 좋았다. 기록에 따르면 모방 신부가 1837년 5월 배티에 공소를 설립했다. 충청도 북부 지역 첫 공소이다. 당시 조선 교회 밀사로 활동하던 김 프란치스코의 집이 배티에 있어서 모방 신부가 이곳을 사목 거점으로 삼은 듯하다.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그해 5월 김 프란치스코의 집에서 3~4일 머물면서 교우들에게 성사를 집전했다.
배티가 한국 천주교회사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850년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이곳에 ‘조선대목구 신학교’를 공식 설립하면서부터다. 페레올 주교는 유학 준비를 위한 소신학교를 설립하고, 그 책임을 다블뤼 신부에게 맡겼다. 1850년 당시 배티에는 교우 20가족 120명이 살고 있었다. 다블뤼 신부는 그해 배티에 집 한 채를 마련했다. 흙과 짚으로 지은 방 두 칸짜리 집이었는데 방 하나는 다블뤼 신부가, 다른 하나는 그의 복사가 사용했다. 다블뤼 신부는 자신의 방을 사제관과 성당, 신학교로 꾸몄다. 다블뤼 신부는 여름철에는 손골에서, 겨울철에는 배티 교우촌에서 신학교를 운영했다. 그러다 다블뤼 신부는 1851년 11월 신학교 전담 신부로 임명되면서 배티에 정주했다. 그는 배티 교우촌에서 신학생, 교우들과 함께 산을 개간해 채소를 가꾸고, 조와 담배 등을 수확해 신학교를 운영했다.
1851년 당시 조선 교회 성직자 수는 단 3명이었다.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그리고 최양업 신부였다. 페레올 주교는 서울과 경기 일원을 제외한 전국의 교우촌 사목을 최양업 신부에게 맡기면서도 다블뤼 신부를 신학교 전담 사제로 임명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결정을 해야만 했다. 그 이유는 더는 조선인 사제 양성을 미룰 수 없었고, 그러기 위해선 신학교의 정착이 무엇보다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블뤼 신부의 건강이 더는 악화해서는 안 되었다.
페레올 주교는 조선대목구 신학교를 ‘허술한 작은 신학교’라고 표현했다. 교사는 단 2명뿐이었다. 다블뤼 신부와 조선인 한문 선생이 전부였다. 다블뤼 신부는 라틴어를 비롯한 그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학문을 가르쳤다. 신학생도 5명에 불과했다. 교육 과정은 소신학교 수준이었다.
신학생 양성에 힘쓴 최양업 신부
다블뤼 신부는 1852년 페레올 주교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하자 배티에서만 머물 수 없었다. 주교를 대신해 서울과 경기도 일원을 사목 방문해야 했다. 그는 1853년 2월 3일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그해 여름에는 배티 신학교를 다른 사목자에게 맡기고 사목 여행을 떠났다. 그 다른 사목자가 바로 최양업 신부이다.
“조만간 사목 방문을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제가 서적에 전념하기 위해 올여름 다른 이에게 맡긴 우리 신학생들은 또다시 다소 방치될 처지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적어도 그 학생들은 안전한 장소로 보내서 적절한 학습을 받게 할 기회라도 우리에게 허락된다면 좋겠습니다. 우리 선교지의 성공 여부가 바로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이를테면 지금까지 그 학생들이 오로지 저의 보살핌에 맡겨져 있었던 만큼 제가 열렬히 관심을 쏟는 그 사업을 위해 특별히 기도해 주세요. 그들이 비록 큰 재능을 갖추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앞으로 꽤 필요한 인재가 될 것입니다.”(다블뤼 신부가 1853년 9월 18일 손골에서 부모에게 보낸 편지)
다블뤼 신부가 배티 신학교를 떠난 표면적 이유는 페레올 주교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면에는 소신학생들의 유학을 반대한 것에 대한 문책이었다. 페레올 주교의 선종으로 조선대목구 선임 사제가 된 메스트르 신부(1852년 8월 입국)는 새 교구장 주교가 임명돼 조선으로 입국할 때까지 조선 교회의 장상(1853년 2월~1856년 3월)으로 활동했다. 그는 국제 신학교가 있는 말레이시아 페낭으로 소신학생들을 유학 보내려 했으나, 다블뤼 신부가 이를 말렸다. 다블뤼 신부는 조선에서 사목할 조선인 사제들이 선비들과 접촉해야 하므로 선교사들과 달리 반드시 한문을 잘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선인 사제들이 존경받고 신뢰를 유지할 수 있기 위해선 반드시 한문 교육이 필요하며, 한문 교육이 소홀할 수밖에 없는 페낭 신학교로의 유학을 반대했다.
이러한 일로 다블뤼 신부는 배티 신학교 책임자 직을 내려놓게 됐고 최양업 신부가 후임으로 1853년 여름부터 신학생들을 지도했다. 최 신부는 메스트르 신부의 뜻에 따라 페낭으로 보낼 세 명의 유학생을 선발했다. 이만돌(바울리노, 23)과 임 빈첸시오(18)는 다블뤼 신부가 선발해 가르치던 신학생들이었다. 나머지 한 명인 김 요한 사도(20)는 최 신부가 선발했다. 김 요한 사도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김백심(암브로시오)의 3남으로 잔재주가 많았으나 성격이 불안정했다. 세 명의 유학생들은 1854년 3월 성주간 때 장수 신부가 타고 온 배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있는 홍콩으로 건너간 후 1855년 6월 12일 페낭 신학교에 입학했다.
“지난봄에 세 학생을 강남의 거룻배를 태워 상해로 보냈는데 그들이 신학교까지 무사히 도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건강하게 잘들 있는지요?… 학생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의 겸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선 사람은 참된 인간성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인간의 본질을 정당하게 평가할 줄도 모르며, 오로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세속적이며 외적인 영화와 부귀공명에서 찾을 줄만 압니다.”(최양업 신부가 1854년 11월 4일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사제가 되지 못한 조선인 신학생들
이들이 최양업 신부가 유학을 보낸 ‘페낭 신학교 조선인 신학생 1기’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모두 사제가 되지 못했다. 병인박해로 성직자 대부분이 순교했고, 배론으로 옮긴 신학교가 폐쇄했기 때문이다. 이만돌은 페낭 신학교 입학 1년 4개월 만에 풍토병을 얻어 퇴교하고 홍콩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서 요양하던 중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을 만나 그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이후 상해 예수회 소신학교에서 공부했고,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랑드르 신부와 조안노 신부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다. 이후 그는 두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해 배론 성 요셉 신학교에 다시 입학해 삭발례를 받았다. 1866년 병인박해로 배론 신학교가 폐쇄되면서 이만돌은 끝내 사제품을 받지 못하고 선종했다.
임 빈첸시오와 김 요한 사도는 1858년부터 1862년까지 페낭 신학교를 다니면서 전 교육 과정을 마쳤다. 둘은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의 지시로 1862년 2월 27일 페낭 신학교를 나와 오메트르 신부와 함께 1863년 6월 조선에 입국했다. 김 요한 사도는 귀국 후 얼마 안 돼 환속했다가 1868년 서울에서 순교했다. 임 빈첸시오는 배론 성 요셉 신학교에서 소품을 받았으나 병인박해로 신학교가 폐쇄되면서 이만돌과 마찬가지로 사제품을 받지 못했다.
1856년 3월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와 푸르티에ㆍ프티니콜라 신부 등이 함께 입국하면서 조선 교회 사제 수가 6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최양업 신부는 1856년 여름까지만 배티를 중심으로 사목했다. 1853년부터 약 3년간 배티가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였지만 최 신부는 여전히 전국 5개 도를 돌아다니며 사목해야만 했다. 1855년까지 최 신부가 입교시킨 성인 영세자 수가 전국 영세자 수의 45였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 준다. 배티는 최양업 신부 이후 메스트르ㆍ페롱ㆍ프티니콜라 신부가 사목을 맡아 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