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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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웃음 주는 ‘뽀빠이’가 외출시 천원짜리 100장 챙기는 이유는

[허영엽 신부가 만난 사람들] (45) 방송인 이상용(헨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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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용씨는 태어나면서 죽을 고비를 넘겼고, 최정상의 인기를 얻는 시기에 사기꾼으로 몰려 좌절했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미사 참여와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는 그는 “죽는 날까지 봉사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상용(헨리코) 형제를 처음 만난 것은 1986년, 내가 서울대교구 반포본당 보좌에 부임한 지 2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미사를 마치고 집에 가는 신자들과 인사하기 위해 성당 마당에 서 있을 때였다. 그때 한 형제님이 다가오며 명랑한 목소리로 “신부님! 오늘 정말 날씨가 좋지요?” 하여 나는 얼떨결에 “네, 아주 좋네요” 하고 대답했다. ‘뽀빠이’가 그려진 옷을 입은 이상용 형제였다. 순간 전부터 잘 알고 있던 착각이 들 정도로 친화력 있게 인사를 나누어준 이상용 형제가 부러웠던 그 기억이 아주 오래전이지만 생생하다. 그 후에 내가 교구 홍보를 맡으면서 헨리코 형제를 주보에 소개하고 강의를 부탁할 기회가 많았고, 대화도 많이 나누어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정진석 추기경님, 염수정 추기경님 교구장 시절에도 헨리코 형제님은 “교구장님이 사실 교구에서 스트레스를 제일 많이 받으시잖아요” 하면서 약 30분간 재미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면 교구장님들은 어린이처럼 늘 손뼉을 치며 웃으셨다. 이상용 형제님은 두 교구장님을 진짜 웃게 하는 재주가 있으신 유일한 분이었다. 그런 노력을 해주시는 형제님의 다정한 마음과 사랑도 따뜻하게 느껴진다. 지난 11월 10일에는 형제님에게 신앙 특강을 요청했는데 다른 일정과 겹쳤는데도 가톨릭회관 7층으로 한걸음에 달려오셨다. 그는 수백 명의 수강생 앞에서 80세 연세가 무색하게 두 시간가량을 쉬지 않고 서서 특유의 속사포식 강의로 좌중을 울고 웃게 했다. 그의 강의는 웃음뿐 아니라 인간의 희로애락과 교훈, 정치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도 있었다.


▲ 이상용씨가 김수환 추기경을 예방하고 있다.



Q. 언제 가톨릭 세례를 받으셨어요.

A. 저는 시골에서 올라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학군단(ROTC) 소위로 임관하여 탱크부대 소대장으로 근무했어요. 그때 군대에서 군종 신부님에게 교리를 열심히 배우고 세례를 받았어요. 저는 무엇이든 결심해서 하며 마음을 다해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에요.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너 앞으로는 너의 일 뿐 아니라 틈틈이 내 일 좀 해라! 알았지?” 그렇게 부르신 것 같아요. 반포성당에서도 주일학교 교장으로 10년 가까이 봉사했어요. 정말 바쁜 때였지만 동시에 너무 보람찬 시간이자 추억이 됐어요.



Q. 근육질인 뽀빠이는 건강미를 연상케 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건강하지 못하셨다고요.

A. 어휴! 말도 마세요. 저는 사실 죽은 목숨이에요. 제가 태어났을 때 영양공급이 전혀 안 돼서 너무 약하게 태어나 거의 죽은 상태였데요. 제가 태어난 당시만 해도 태어나서 곧 죽는 아이들이 많았던 때지요. 가족들이 눈물을 머금고 곧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저를 땅에 묻었데요. 그런데 이모님이 밤에 몰래 저를 파내서 산으로 도망갔데요. 그리고 이틀간 물 한 모금 못 삼켰는데 기적처럼 숨을 가늘게 쉬며 살아났데요. 다섯 살까지 누워서 앓다가 여섯 살에서야 비로소 걸음마를 했다고 해요. 초등학교 때까지 책가방을 잘 못 들었을 정도였으니 이러다가 난 중학교도 못 가고 죽겠다 생각했죠. 11살부터 아주 작은 아령으로 운동을 시작했어요. 매일 운동한 결과 기적처럼 18살에 미스터 대전고, 미스터 충남, 근육질의 남자가 되어 당당하게 고려대에 입학했어요. 하느님의 은총이고 기적이죠. 고려대에서도 명물이었죠. 미스터 고대, 고대 응원단장을 지내고 ROTC 장교로 복무했어요. 전역한 후 외판원을 하다가 연예계에 들어와 건강의 상징인 ‘뽀빠이’가 됐어요. 저는 운동을 시작한 이후 하루도 운동을 쉰 날이 없어요. 죽는 날에도 운동하고 눈 감을 것 같아요.(웃음)



Q. 한동안 심장병 어린이를 고치는 데 전력을 다하셨어요.

A. 네, 우연한 기회에 어린이들이 돈이 많이 드는 심장병 수술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경우를 보았어요. 어린이는 나라의 미래잖아요. 그때는 다른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어린이 하나라도 살려야 한다는 마음이었죠. 제가 버는 수입 대부분과 도움의 손길로 수백 명의 아이에게 새로운 생명을 찾아주었어요. 아이들의 낯빛이 누렇고 어두운 죽음의 색을 띠고 있다가 수술 후 발그스레한 홍조를 띠며 웃는 모습을 보면 세상을 다 얻은 것같이 기뻤어요.



Q. 큰 보람이었던 심장병 어린이 사업이 오히려 인생에 가장 큰 어려움이 주었다고요.

A. 어느 날 모든 언론에서 나를 머리기사로 내보냈어요. ‘심장병 어린이 돕기에 힘써 온 이상용은 심장병 어린이를 도운 적이 없고 기금을 횡령한 파렴치한이다’ 하루아침에 아이들의 우상에서 인생 벼랑 끝으로 떨어진 거죠. 어느 당 국회의원에 출마하라는 권고를 듣지 않은 데 대한 보복이었다고 생각이 들어요. 지금처럼 반박할 미디어나 SNS가 없었으니 전 꼼짝없이 보도된 내용처럼 사기꾼이 된 거죠. 최고 인기를 누리다가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당했어요. 정말 억울하고 고통스러웠어요. 죽음으로 결백을 증명해야지 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했어요. 그 순간 故 김수환 추기경께서 저를 불러 위로해주셨어요. “헨리코! 눈이 왔구나, 쓸지 마라. 어떻게 이 많은 눈을 쓸래, 기다려라. 봄이 오면 눈이 녹고 너는 다시 나타나리라.” 그 이후 방송일이 모두 끊어져 미국으로 가서 관광안내자로 하루 20달러를 벌며 버텼죠. 이후 몇 년 후 법원에서 ‘혐의 없음’ 판결이 나왔지만, 신문 한 귀퉁이에 한두 줄 나왔죠. 인쇄된 판결문을 아직도 가지고 다녀요.

▲ 가톨릭평화방송의 열린 특강에 출연한 이상용씨가 허영엽 신부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Q. 기도와 봉사를 많이 하신다고 들었어요.

A. 가능하면 명동대성당 새벽 미사에 가서 묵주기도를 하면서 성당을 다섯 바퀴 돌면 보통 성모송을 100번 하는 것 같아요. 특별히 명동 사제관 앞에 있는 가시관 쓰신 예수님을 보고 묵상을 많이 해요. 명동대성당에 못 가는 날이면 양재천을 걸으면서 기도하죠. 죽을 때까지 봉사하고 싶어요. 아픈 어린이들을 위해 다시 봉사하고 있고요. 특히 홀몸노인들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드는 봉사를 하고 있어요. 노인들이 돈이 문제가 아니라 몸을 움직이고 일을 해야 삶의 의미도 찾을 수 있으니까요.



Q. 매일 1000원 지폐 100장이 들은 봉투를 챙겨서 집을 나서신다고요.


A. 돈 쓸 일이 많아요.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보면 몇 장씩 드리고 식당에서 서빙하는 아주머니에게도 감사의 표시로 몇천 원 드리지요. 길을 가다 보면 점심값으로라도 드려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요. 적은 돈이지만 정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아요. 사실은 주는 제가 더 기쁘지요.



인터뷰 끝에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만 해달라고 했다.

“본당에서 신부님 강론 중에 한 청년이 졸고 있었어요. 신부님께서 ‘할머니, 그 옆에 조는 학생 좀 깨워주세요’ 하고 부탁하자 할머니는 ‘신부님이 재워놓고 나보고 깨우래유… 재운 사람이 와서 깨워유’ 하셨대요. 세계의 신부님들 재미있고 졸리지 않은 강론 부탁드려요. 인생 80을 살아보니 별것 없어요. 내가 말을 줄이고 상대의 말을 잘 들으려고 노력하면 우리들은 좀 더 평화롭게 살 것 같아요. 남이 날 흠집 내고 흉보고 그래도 냅둬유! 허다 말겄지유! 매일매일 즐겁고 기쁘게 잘 웃으시고 남을 도우면서 살면 행복한 거예유!”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영성심리상담교육원 원장)

▲ 허영엽 신부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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