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열도의 남서부 규슈(九州)에서도 서쪽 끝에 위치한 나가사키(長崎)현은 16세기 후반부터 일본에서 가장 활발하게 천주교 선교가 이뤄진 곳이다. 예부터 대륙과 일본 섬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외래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덜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선교 활동이 이뤄져 견고한 신앙공동체가 완성됐다. 2세기 이상에 걸친 엄격한 금교 정책과 참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잠복 기리시탄’(?れキリシタン)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을 지켜온 역사가 찬란하다.
지난 2018년 나가사키현을 비롯해 구마모토(熊本)현 아마쿠사(天草) 지역을 아우르는 가톨릭 유산들이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고, 총 456㎞에 달하는 순례길이 ‘세계유산 순례의 길’로 조성됐다. 나가사키현 관광연맹과 국제관광진흥실이 소개하는 ‘세계유산 순례의 길’을 나가사키현 지역 중심으로 돌아봤다.
■ 박해에도 놓지 않은 십자가, 거룩한 순교의 땅
이번 일정의 첫 순례지는 나가사키현 히라도(平?)에 있는 순교자 ‘니시겐카’(西玄可·가스팔)의 묘지다. 초기 일본교회의 순교 역사를 대표하는 곳이다. 1609년 순교한 니시겐카는 히라도의 이키즈키(生月) 지역 최초의 순교자로, 나가사키 16성인 중 한 명인 성 토마스 니시리쿠자에몬(西六左衛門) 신부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1550년대 히라도의 영주를 대신해 신하가 세례를 받자 이키즈키 섬 전체 주민들이 신자가 됐고 그 규모는 8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금교령과 박해로 신자 대부분이 나가사키로 탈출했고, 이들을 지휘하던 니시겐카는 1609년 11월 4일 ‘구로세의 쓰지’(??ノ?) 라 불리우는 묘지에 있는 십자가 옆에서 처형된다. 그는 동시에 처형된 아내와 장남과 함께 188복자로 시복됐다.
히라도 이키즈키 섬의 역사와 생활을 소개하는 박물관인 ‘섬의 박물관’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일본인 신자들을 칭하는 ‘기리시탄’(キリシタン)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100년 전 기리시탄들의 가옥 내부를 재현해놓은 모습 등이 흥미롭다.
일본 국가지정 중요문화재인 히라도의 ‘다비라 천주당’(田平天主堂) 성당 건물은 지역 신자들의 눈물과 땀으로 만들어졌다. 1915년 12월 착공해 1917년 10월 준공됐으며, 나가사키현의 유명 건축가인 데츠가와 요스케(鐵川?助)가 설계한 최후의 벽돌 외벽 성당이다. 기록에 따르면 신자들이 손수 벽돌과 기와, 시멘트, 목재 등을 배에 일일이 싣고 건너와 별다른 장비도 없이 손으로 직접 성당을 지어올렸다고 한다.
나가사키현 오무라(大村)시의 주택가에는 ‘머리무덤’(首?迹, 구비즈카 터)과 ‘몸통무덤’(胴家跡, 도즈카 터) 기념비가 있다. 1657년 당시 이 지역에서 신자 603명이 잡혀와 406명이 대거 참수되는 일이 벌어졌다. 순교자 중 131명의 머리와 몸은 서로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각각 묻혔다. 머리와 몸을 함께 묻으면 ‘천주교의 요술’로 이들이 다시 되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해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순교자들의 머리는 따로 소금에 절여 문에 20일간 매달았다고 한다. 지역민들의 두려움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이었다.
인근의 ‘호코바루(放虎原) 순교지’에는 복자 205위 현양비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온 조선 출신 순교 복자 13위 현양비도 그 앞에 놓여있다. 1657년 참수돼 머리와 몸이 각각 따로 묻혔던 신자 131명이 처형당한 현장이기도 하다.
■ 평화를 향한 외침, 신앙을 지킨 피와 땀
전쟁과 원자폭탄의 비극으로 잘 알려진 나가사키시의 불행한 역사는 역설적으로 ‘세상의 평화’라는 주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노력을 해나가야 하는지 여실히 보여 준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의 피해를 직접 입고도, 주변의 쓰러진 사람들을 치료한 의인 나가이 다카시 박사(永井隆·바오로·1908~1951)가 기거했던 뇨코도(如己堂)이다.
시마네(島根)현 출신인 나가이 박사는 나가사키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방사선 분야를 연구하며 조교수로 활동하던 중 1945년 원폭 피해를 입고 백혈병 등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돌보지도 못하는 지경에서도 다른 피해자들의 구호에 힘을 쏟았고 ‘여기애인’(如己愛人, 남을 자기같이 사랑하라)이라는 말을 남기며 평화를 위한 활동에 몸을 바쳤다. 1951년 43세를 일기로 짧은 생애를 마감한 나가이 박사가 1948년부터 거처로 사용했던 ‘뇨코도’는 다다미 2장 정도 넓이의 소박한 모습이다. 평화를 위해 일생을 바친 나가이 박사는 저서를 통해 “일본이 평화헌법을 수호하고 다시는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반전주의자이기도 했다.
나가사키시 성모의 기사 수도원(聖母の騎士修道院)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의 굴레 속에서 사랑을 실천해 ‘나가사키의 성인’이라 불리우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Maximilianus Maria Kolbe, 1894~1941)의 정신을 배울 수 있다. 폴란드 출신인 콜베 신부는 1930~1936년 나가사키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불면증과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성모 마리아의 사랑을 실천했던 콜베 신부는 이후 고국으로 돌아간 뒤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해 밥을 굶는 ‘아사형’을 받고 1941년 47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1971년 복자가 됐고 1982년 성인 반열에 올랐다.
불행한 역사에 고통받으면서도 평화와 사랑을 외친 이들의 모습은, 상상조차 힘들 정도로 잔인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려 했던 일본 초기교회 순교자들의 피와 땀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나가사키역 근처 언덕에 있는 니시자카(西坂) 공원은 1597년 일본 최초로 신자들이 순교한 장소다. 프란치스코회와 예수회 수사, 일본인 신자 등 26명이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했고, 1862년 성인 반열에 올랐으며 시성 100주년을 맞은 1962년 ‘일본 26성인 기념비’ 및 ‘일본 26성인 기념관’이 조성됐다.
초기교회 순교자들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1864년 완공된 나가사키시 ‘오우라 천주당’(大浦天主堂)에서 그동안 ‘잠복 기리시탄’으로 몰래 신앙생활을 이어왔던 초기교회 신자들의 후손이 발견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일본의 금교령은 1873년 드디어 철폐됐고 일본 가톨릭 신앙의 부활이 시작될 수 있었다.
일본 나가사키 방준식 기자 bj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