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읽기
긴 호흡으로 책을 읽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신학과 인문·사회 관련 책들 가운데 내용 전체를 정독하는 책은 많지 않다. 큰 흐름과 주제만 파악하고 필요한 부분을 선별해서 읽는다. 글 숙제와 강의를 위한 읽기에서 오는 폐단이다. 사실, 우리 삶은 수미일관하고 정연한 논리로 항상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논리를 늘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공감의 읽기는 중요하지만, 결국에는 자기 사유의 프레임 속에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읽기는 어차피 창조적 오독이며, 지독한 이기적 읽기다.
두 권의 소설을 읽었다. 김연수의 단편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와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다. 문학 작품들은 가볍게 설렁설렁 읽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이야기는 덩어리 전체로 읽어야 하니 발췌 읽기를 할 수 없다. 김연수의 소설은 서울 가는 기차 안에서 읽기 시작했다. 연결되지 않는 단편 소설들이었지만, 거의 한달음에 다 읽었다. 오랜만에 긴 여운이 남는 읽기였다. 특히 표제작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와 ‘난주의 바다 앞에서’와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는, 적어도 나에게는 뒤표지에 적힌 것처럼, “시간을 상상하는 방식”과 “이야기가 우리 삶을 바꾸어내는 경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우리의 기억과 상상과 정신 안에서 교차되고 역전되고 연장되고 확장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청량리로 가는 기차 안에서 40년 전 나의 대학 시절 풍경을 기억하면서 ‘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체감했다.
■ 서사적 언어 vs. 논리적 언어
이야기가 갖는 힘을 다시 생각한다. “이야기는 우리가 현재의 사물을 지각하고 과거의 사물을 기억하며 미래의 사물을 창안하는 근본 형식이다.”(김상환 「이야기의 끈」) 두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이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운명의 엇갈림과 굴곡, 신앙과 신념의 모습에 대한 상념과 애틋한 느낌들이 마음 한 켠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신학적 진술과 교리적 진술에서는 잘 느껴보지 못한 감동이었다고 말하면 조금 지나친 평가일까.
우리 신앙적 진술의 모습을 생각한다. 신학과 교리는 그 속성상 논리적 언어의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학과 교리는 신앙의 내용을 선포하고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전개될 필요가 있다. “언어는 애초에 이야기의 형식을 띠었다. 논리적 언어는 그런 서사적 언어를 모태로 해서 태어났다”(김상환). 이야기가, 서사적 언어가 더 원초적이고 더 넓은 외연을 갖고 있다. 공감과 설득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야기가 더 효과적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이야기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이야기의 형식은 언어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 역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진다.”(「이토록 평범한 미래」) “이야기는 행동에 담긴 의미를 이해 및 전달하는 기본 형식이다. 삶에 방향을 부여하고, 목적을 실현할 절차를 설계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서사에 의존해야 한다.”(김상환 「일꾼과 이야기꾼」) 신앙인의 정체성,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과 연대는 이야기 속에서 형성된다. 좋은 이야기, 진정한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되고, 그 이야기를 매개로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 윤리와 실천의 힘을 키워간다. 이 시대에 적합한 우리 신앙의 서사가 절실하게 요청된다.
오늘의 교회에서 선포되는 예수의 이야기, 신앙인들의 이야기가 과연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지고 있는지 깊이 고민할 일이다. 이 시대의 신학적 진술과 교리적 진술이 좀 더 서사적 방식으로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 우리 생의 다양한 운명들
사람은 저마다 제 운명의 시공간을 살아간다. 운명은 선택이 아니라 주어짐이다. 그런데 그 운명의 곡절은 다양하다. 참혹한 박해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 이념적 대립과 갈등 속에서 처절한 시절을 지냈던 사람들의 운명을 상상한다. 옛 시절의 사람들에 비하면, 그래도 우리는 좋은 시공간 속에서 살아간다는 걸 느낄 때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한다.
조금 슬픈 일이지만, 운명은 공평하지 않다. 인간은 그래도 제 운명의 무게를 감당하며 지고 간다. 어떤 운명의 질곡이라도 인간은 견뎌낸다. 생의 곡절을 담담하게 건너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처연하지만 아름답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이념적 갈등 속에서 어느 한 입장을 선택했던 어떤 사람의 생을 그려낸다. “아버지는 십대 후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여든둘 된 노동절 새벽,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짊어졌다. 사회가 개인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묻는 게 옳은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내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단편 소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안에는 세 명의 바르바라 이야기가 나온다. 성녀 바르바라, 최양업 신부의 편지에 나오는 소녀 바르바라, 소설 속 화자의 할아버지 여동생 바르바라다. 그 세 바르바라는 저마다 다른 시공간 속에서 다른 운명을 산다. 셋 다 일찍 죽음의 숙명을 맞이한다. 하지만 작중 화자와 할아버지의 기억과 사유와 정신 속에서 그 셋은 연결되고 그 삶들은 연장된다.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거지. 그게 바로 사랑의 정의야.”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나갈 수는 있어. 우리의 기억은 시공간적으로 겹쳐져 있으니까.” “겹쳐진 정신의 삶, 그 기저에 현존하는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 개체로서 사람은 소멸하지만 인간 역사는 여전히 이어지고, 육체는 늙고 죽지만 정신의 삶은 계속된다는 것일까. 몸과 영혼, 영원과 구원에 관한 신학과 교리의 진술이 조금은 더 문학적이었으면 좋겠다는 뜬끔없는 생각이 든다.
■ 신념과 신앙의 아름다움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안에는 신념을 지닌 사람들이 나온다. 사회적 신념이든 신앙적 신념이든, 자신이 간직한 신념을 지키며 그 신념의 무게를 감당하고 책임지며 살아가는 사람은 아름답다. 우리가 타자의 내적 신념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그 신념이 펼쳐내는 삶의 모습을 보고 그 신념의 아름다움을 생각할 뿐이다.
진정한 신념은 남을 해치지 않는다. 타자를 판단하고 배제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소설 속에서 세 번째 바르바라를 죽인 사람의 신념은 그저 흉측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참다운 신념은 자기 내면을 지키고 제 생의 운명을 견디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우리의 신앙적, 신학적, 교리적 신념의 모습을 생각한다.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