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가 만난 사람들] (48)이병갑 박사 도리노
▲ 이병갑 박사가 NASA에서 무중력 훈련을 마치고 함께한 한 우주인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2001년, 미국에서 온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내용은 한 미국교포 형제분의 야고보 사도에 대한 질문이었다. 당시 나는 가톨릭평화신문에 매주 ‘성경 속 인물’을 게재하고 있었는데 성경에 중복으로 등장하는 야고보에 대해 아는 대로 답변을 드렸고 메일 주소를 첨부했다. 그분은 기대 못 했던 친절한 답장이라며 감사의 인사를 보내주셨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지금까지 20년 넘게 지속하고 있다.
편지를 보낸 분은 미국 우주항공국(NASA)의 중앙의료원장인 이병갑(도리노) 박사였다. 그는 2007년에 47년간의 의사 생활과 30년간의 NASA 의료원 근무를 마쳤다. 그러나 은퇴 후 다시 미국 정부의 현장에 복귀하셨는데 아주 예외적인 것이라 그분의 위상과 실력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분은 언론 노출을 극히 꺼리셔서 이번에 신문에 짧게 원장님을 소개하는 것도 오랜 기간 설득(?)했다.
그분은 미국 최고인력과 과학기술을 가진 NASA의 중책을 아주 오래 맡은 것만으로도 세계에서 한국인의 자랑이 될 만큼 큰 성공을 이루었다. 주변 미국 주교님들도 원장님은 진정한 선교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사제가 되겠다던 약속을 못 지킨 보속(?)으로 앨라배마주 헌츠빌에 있는 공소 회장으로 활동하며 교리를 가르쳐 250여 명을 영세로 이끌었다고 웃는다.
큰 신앙의 소유자인 도리노 원장님을 알면 알수록 그분의 삶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나는 확신한다. 모든 역경을 딛고 미국의 최고 권위자로 성공한 힘은 그분의 깊은 신앙심 덕분이다. 소신학생으로 덕원신학교에서 공부하다 전쟁으로 서울 신학교를 거쳐 가톨릭대 의대로 전과하여 의학을 전공한 그는 가톨릭대 의대와 미국 존스 홉킨스대에서 학위를 받고 NASA 메디컬센터 원장을 지낸 미국에서도 주목받는 의료인이다. 국내에서 4년간 경희대 의대 교수로 지냈지만, 유신독재 정권에 반대하다가 정보기관에 수배되어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출국했다. 그후 미 해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잠수의학을 전공하고 NASA 메디컬센터에서 오랫동안 일해 왔다.
Q. 우리는 태평양을 건너온 편지 한 통으로 20년 넘게 인연을 이어가고 있네요. 저도 글을 쓸 때 힘이 들 때가 많은데 제 원고를 사랑해주셔서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A. 허 신부님, 이번에 저서들을 많이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귀한 선물입니다. 저는 신부님의 탈렌트가 신자들에게 쉽게 성경에 관해 글로 알려주시는 것이라 믿어요. 전에 제가 신부님의 글을 먼 이국땅에서 보고 복음을 깨닫는 사람들이 많으니 수십 개의 본당을 사목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렸지요. 진심입니다. 신부님의 원고를 전부 컴퓨터에 타자해서(성경을 필사한다는 마음으로) 보관하고 있어요. 성경을 읽으면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던 대목들을 이해하는 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Q. 원장님, 저도 언젠가 그리스 성지순례를 가서 크레타 섬에 들렀을 때 미국에서 성지순례 오신 한 자매님이 주보에서 제가 쓴 강론 ‘어머니’를 읽고 큰 감동을 하였다며 저를 와락 끌어안으시며 울음을 터뜨리셨어요. 글이란 때로 참 신비하다고 느껴요. 저는 사실 원장님이 입었던 북한군, 국군, 미군의 군복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이 겪은 현대사의 고통이 느껴져서 눈에 이슬이 맺혀요. 어린 시절인데도 국군인 아버지에게 미아리고개에서의 전투 장면을 여러 번 들으며 마음이 안 좋았어요.
A. 제가 소신학생이었던 6·25 전쟁 이전부터 북한은 신부님들을 구속하고 천주교인들을 박해했어요. 6·25 전쟁 몇 달 후 저도 평양 신3리 전차 정거장 앞을 지나다가 강제로 인민군에게 붙잡혔어요. 그 후 가족들은 만나지 못했지요. 당시 징집 나이도 아닌 17살인데도 총알받이로 낙동강 전선으로 보내졌어요.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후 북한군이 북쪽으로 후퇴했어요. 저는 줄지어 행군하다 한 골목길 옆을 지날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떤 신비로운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어요. 일생일대의 순간이었죠. 무조건 산 쪽으로 도망쳤는데, 귀 옆으로 빗발치는 총탄에도 무사히 살아남은 게 기적이에요. 산속에서 지내다 너무 배가 고파서 한밤중에 음식을 훔치러 마을에 내려왔어요. 아마 경상북도의 아주 작은 시골 같았는데 큰집이 마침 보였어요. 그 안을 보다가 달빛에 반짝이는 십자가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천주교 공소라는 간판이 또렷이 보였어요. 저는 굶주림도 잊고 너무 죄송해서 바로 무릎 꿇고 십자성호와 간단한 기도를 드리고 산으로 도망쳤어요. 당시 인민군 탈영범은 붙잡히면 즉결 처분당했고 한국군에게 잡혀도 안전보장이 안 됐어요. 우여곡절 끝에 저는 주님의 은총으로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아 제주도의 신학교에 가게 되었어요.
Q. 제주도의 신학교 생활은 어땠나요? 거기에서도 공비들이 자주 출몰해서 신학생들도 납치했다고 선배 신부님들에게 들었어요.
A. 현재의 서귀포시 근처 서홍리의 작은 마을의 공소 건물로 서울 신학교가 피난을 갔어요. 서홍리는 한라산 공비들의 습격이 잦았던 곳이죠. 서홍리 입구엔 성문이 여러 개였는데 성문을 지키는 일은 신학생들과 여자 주민들이 했어요. 청년은 국군에 징집되거나 공비에 납치되어 한 명도 없었어요. 1951년 1월 어느 날, 비가 내리고 아주 캄캄한 밤이었어요. 그때 갑자기 큰 소리와 총소리가 나며 공비의 습격을 받게 되었어요. 보초였던 저는 죽창을 들고 있었지만, 총을 쏘며 몰려오는 공비들에 대항할 수 없었어요. 무슨 힘이었는지 공비가 들이닥치기 몇 초 전 10m도 더 되는 포플러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간신히 살았어요.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곳을 찾아가니 눈물이 터져 앞을 가렸어요. 저는 자주 천사가 제 손을 잡아주셨다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6·25 전쟁 때와 그 후에도 정말 그런 체험을 많이 했어요.
Q. NASA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맡으셨었나요?
A. 다 말하기엔 어려운 것도 있지만, 우주로 떠나는 우주인에 대한 모든 것에 다 관여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우주비행사들과 엔지니어들의 선발과 훈련 및 건강관리 등 머리끝부터 신발 끝까지 모든 것을 관리하는 일이지요.
Q. 원장님은 인민군, 국군, 미 해군 복장 외에도 신학교에서 수단을 입으시고 흰 의사 가운까지 입으셨어요. 3개의 군복만 보더라도 정말 우리나라 현대사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혹시 가장 길게 일하신 NASA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일이 있나요?
A. 아주 많아요. 그중에서도 미국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가 착륙 전 상공에서 폭발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고 충격이에요. 착륙 16분을 앞두고 기체가 하늘에서 폭발해 7명의 탑승자가 잔해만 남긴 채 사라졌어요. 조종사 에드워드 맥콜 대령은 1993년에 영세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어요. 그는 우주선 발사 전날 밤 고해성사까지 보고 떠났어요. 나는 그의 죽음은 너무 안타깝고 슬프지만, 영혼의 준비를 멋지게 잘하고 떠나갔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한편으론 부러움도 있었어요. 언젠가는 다 가야 하는 길이잖아요.
도리노 원장님은 미국에서 코로나 팬데믹이 한참 극성을 부릴 때 의사인 딸 사비나씨의 사진을 보내시며 사위와 손자도 다 의사라 코로나 일선에서 목숨을 건 사투를 매일 벌인다고 불안하다며 기도를 부탁하셨다. 그때 처음으로 사진을 보며 기도했던 기억이 새롭다. 신문은 지면의 한계로 짧게 쓰지만 도리노 원장님의 이야기를 우리 후세를 위해서도 꼭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 페이스북에서라도 소개하고 꼭 책으로 묶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