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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 죽을 고비… 정 추기경에게 의연하게 살아갈 힘 주신 하느님

[허영엽 신부가 만난 사람들] (49·끝) 고 정진석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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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석 추기경이 서임 후 로마 신학원 마당에서 허영엽 신부와 산책을 하고 있다.



“허 신부, 2년만 수고해줘.”

2004년 봄, 홍보책임자로 부임한 후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당시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님이 하신 말씀이었다. 생각할 틈도 없이 “네” 하고 대답했지만 ‘왜 2년이라 하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2년 뒤 교구장님이 정년이 되어 현직에서 물러나실 때를 의미하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는 생각도 못 했다. 2년이 아니라 18년이라는 긴 시간이 될 것을 말이다.

2006년 2월, 교구장님은 75세에 추기경에 서임되셨다. 로마에서 추기경 서임식이 열리고 며칠 후, 로마 신학원에서 저녁 식사 전에 정 추기경님과 산책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생각하면 다소 당돌한(?) 질문이라 송구한 마음이 든다. 그래도 추기경님은 개의치 않으셨다.

“추기경이 될 것이라고 조금이라도 예상을 하셨나요?” 그러자 손사래를 치면서 말씀하셨다.

“한순간도 생각한 적 없었어. 서울대교구장으로 갑자기 임명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야. 사실 39세에 한국 교회 헌금을 위해 미국 본당을 순회하다가 편지로써 주교로 임명되었을 때만 해도 67세에 청주교구장으로 노후를 마칠 거라 생각했지. 나로서는 얼떨결에 계속 새로운 직무를 맡고 있어.”

“니콜라오 성인과 정말 비슷하네요.”

잠시 후 그 뜻을 아셨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웃으셨다. 정 추기경님은 식사 자리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으면 항상 다른 사람보다 한 박자 늦게 어깨를 들썩이며 파안대소하셨다.

니콜라오 성인은 대중에게 산타클로스로 알려진 인물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성인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선에 헌신했고 더 큰 뜻을 품고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뒤 미라의 교구장 주교가 선종했다. 주교들은 후임을 찾기 위해 기도하다 어느 날 밤, 하늘에서 목소리를 들었다. “내일 아침 성당에 처음 들어오는 ‘니콜라오’라는 사람을 주교로 선택하라.” 다음 날 아침 성당에 기도하러 갔던 니콜라오 성인은 영문도 모른 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얼떨결에 주교로 축성됐다. 성인의 많은 선행과 기적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교회에 전해오고 있다. 정진석 추기경 전기를 위해 여러 번 인터뷰를 진행하며 그동안 미공개한 자료를 싣는다.

▲ 아벤티노 언덕의 열쇠 구멍은 바티칸, 로마, 몰타 기사단의 나라가 보이는 곳이다. 정 추기경은 여행 중 가장 열심히 듣고 호기심이 많았다고 한다.




Q. 인터뷰하면서 과거의 삶, 특히 중·고등학교와 20대 초반 시절을 떠올리는 데 어려워하셨어요.

A.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를 일부러 생각 안 하려고 기억의 저편으로 꾹꾹 눌러놓았던 것 같아. 실제로 기억이 없어진 것도 있고. 아마도 그때 시절을 생각하는 것이 두려웠을 거야. 고등학교 시절 독서 클럽에서 무신론에 빠져 인생의 혼란기를 겪었거든. 당시의 시대 상황도 그랬던 것 같아.



Q. 가장 존경하는 분으로 꼽으신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셨던 김형석 박사님을 만나는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했을 때, 생각만 하시고 대답을 안 하셨어요.

A. 살면서 선생님을 자연스레 만나면 좋겠다 싶었어. 그보다 선생님과의 기억이 너무 아름다웠기에 그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청소년 때의 순수한 마음도 있었고…. (실제로 두 분의 만남은 정 추기경님 빈소에 김형석 박사님이 조문하시며 이루어졌다.)



Q. 추기경 서임 발표 후, 한 언론 매체에서 추기경님 아버님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모두 깜짝 놀랐는데 많이 당황하셨을 것 같아요.

A. 사실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랐어. 가족들에게 아버지를 말하면 일본에 계신다고 얼버무리는 대답이 돌아왔거든. 어느새 우리 가족들에게 ‘아버지’는 금기어처럼 되었지. 내가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친척들을 통해 우연히 들었지만, 어머니에게 묻지 않은 것은 ‘무슨 사정이 있겠지’라고 생각해서 참았기 때문이었어.



Q. 2006년 2월 말에 아버지에 대한 기사가 모 언론에서 나오고, 그제야 교구청 사제들에게 알고 계신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는데 추기경께서도 기사보다 더 많이 알고 있지는 않으셨어요.

A. 아버지의 얼굴은 1931년 조선일보에 실린 사진을 통해 처음 뵈었어.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아 1931년에 나온 신문 기사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재판받게 된 대학생들의 사진이 게재되었던 것이지. 그렇게 크게 보도했으면 아마도 큰 사건이었던 것 같아.(아버지가 일본 경찰에 붙잡힐 때 정 추기경은 어머니 태중에 있었다.) 아버지는 사회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한 유능한 공학도였고 북한에서 고위직(공업성 차관)까지 지냈지만, 1950년대 말 북한 당국에 의해 숙청되었다고 알고 있어.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시대와 민족 분단의 비극이 낳은 인물인 거지. 그런데 아버지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이 오히려 나중에 자신을 살게 해 준 기회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Q. 그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A. 6·25전쟁이 터지고 3일 만에 서울이 북한군 수중에 떨어졌어. 당시 나는 서울대 공대 1학년이었는데 7월 초 북한군이 집에 찾아왔어. 보안서로 끌려가 지하 작은 방에 갇혀서 밤새도록 심문을 당했어. 질문 내용은 주로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어. 심문하는 사람이 계속 바뀌면서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때리기도 하고 회유도 하면서 밤새 몹시 시달렸어. 결국에는 어깨에 별 견장을 단 북한군 장교가 들어와 느닷없이 권총을 뽑더니 내 이마에 대고 쏜다고 했어. 그때 내가 정신이 잃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지. 그리고도 심문에 별 소득이 없었는지 보안서 마당에 나를 내동댕이쳤어. 밤새 심문당할 때 옆방에서 욕설과 함께 비명이 계속 들렸는데 그것이 더 무서웠던 것 같아. 하룻밤이었지만 공산주의의 폭력성과 교활함, 야만성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어. 그 길로 9·28 서울 수복 때까지 돈암동 친척 집에 숨어 살게 되었지. 이후로도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가능하면 안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도 나와 우리 집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아예 인연을 끊으셨나 하는 생각이 들어.



Q. 가톨릭평화신문에 나온 자신의 기사를 읽으시면서 “마치 내 무덤에 와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들린다”고 하셨는데 마치 죽음을 초월한 삶으로 보였어요.

A. (웃음) 살아있는 사람이 어떻게 죽음을 넘어서겠어? 그렇게 생각한다면 교만한 거지. 그러나 젊은 시절 세 번의 죽음을 우연히 비껴가면서 그때부터 내 삶은 그저 덤으로 사는 것이라 생각을 늘 했었어. 그래서 화가 날 때도 화를 덜 낼 수 있고 어려워도 인내하면서 살 수 있었지. 교구장이란 자리가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거든. 이미 죽은 목숨이라 생각하면 무엇이든 견딜 수 있었다고 생각해.



추기경 서임 뒤 한 인터뷰 중 故 최인호 작가가 아버지에 대해 질문하면서 “아버지와 한 번도 같이 못 사셨는데 어떻게 ‘하느님 아버지’란 개념에 접근했나요?”라고 하자 그때 정 추기경은 대답했다. “아마도 어머니를 통해 하느님의 개념에 접근했을 것 같아요.” 염수정 추기경께서 정 추기경님의 장례미사 때 말씀하셨던 “김수환 추기경은 아버지, 정진석 추기경은 어머니 같다”라는 표현이 새삼 새롭게 느껴진다.





※‘허영엽 신부가 만난 사람들’을 연재해주신 허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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