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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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성화 작가로 가톨릭 미술의 초석 놓은 장발 화백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4) 장발 루도비코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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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교회 최초의 성화 작가 장발 화백이 등장하며 한국 가톨릭 미술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사진은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제대 뒤편에 설치된 장발 화백 작 ‘14사도’.



한국인 최초의 재속 프란치스칸

장발은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당시 휘문고보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미술가인 고희동이 미술 교사로 있었다. 고희동의 그림 지도를 받으며 화가의 길을 꿈꿨다. 장발은 오래전부터 성화에 뜻을 품고 있었다. 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서양화의 기초를 닦았다. 이듬해에 동경미술학교를 중퇴하고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뉴욕의 국립디자인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컬럼비아대학 실용미술학부에 입학해 다양한 미술 과목을 공부했다. 장발 형제는 유학 중에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었다. 한국인 최초로 입회한 것이다. 형제는 나중에 우리나라 재속 프란치스코회 뿌리가 되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세속에 살면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을 실천하며 세상의 성화를 위해 힘쓰는 신자들의 단체이다. 미국 유학 후, 장발은 형과 함께 이탈리아 로마로 갔다. 조선 가톨릭교회가 장발 형제를 조선 신자 대표로 바티칸에 파견한 것이다. 그곳에서 ‘조선 순교 복자 79위 시복식’이 거행돼 이를 참관하라고 보낸 것이었다.

장발은 시복식을 참관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자신의 모교 휘문고보를 비롯해 동성상업학교, 계성여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생을 가르치면서도 시간을 내어 성화를 그렸다. 일반 작품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친일 미술 단체로 분류된 조선미술가협회 서양화부 평의원으로 활동했고 창씨 개명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친일 작가들처럼 일제를 찬양하는 작품은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조선미술전람회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민족적 색채가 짙은 서화협회전에만 작품을 냈다. 그렇지만 서울대 일제잔재청산위원회에서는 장발을 서울대 1차 친일 인물 12명 중의 한 명으로 발표했다. 장발은 해방 후, 미 군정 서울시 학무과장으로 있으면서 서울대학교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후 서울대 예술대학 초대 미술학부장으로 취임했다. 초대 학부장이 된 배경은 이렇다. 당시 미군정청의 헤리 앤스테드가 서울대 임시 총장이었는데 미국에서 공부하고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물색하다가 서울시 학무과장으로 있던 미국 컬럼비아대학 출신의 장발을 발탁한 것이다. 장발은 15년 동안 학장으로 재임하면서 대한민국 최고 예술가를 교수진으로 확보했다. 교수진은 김환기, 길진섭, 윤승욱, 김종영, 이순석, 이병현, 장우성, 박의현, 유영국, 노수현, 김세중, 박세원, 성낙인, 장욱진 등이었다. 장발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면 서울대 미대 교수 후보에 들지도 못한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가톨릭 신앙을 가진 사람을 채용하려 했다. 또한, 개신교인으로 교수가 된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개종시켜 가톨릭에 입교시켰다. 그러곤 자신의 세례명까지 물려주며 대부가 되었다.



서울대 마크 디자인

1950년대 미술 단체는 대한미술협회(회장 고희동)만 있었다. 그러나 한국미술가협회가 서울대 문리대 강당에서 발족했다. 회장은 서울미대 학장 장발이었다. 양 단체는 심하게 대립했다. 그 연유는 이렇다. 대한미술협회 정기총회 회장 선거에서 전 회장이었던 고희동과 장발이 경합을 벌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스승과 제자가 회장 자리를 놓고 경합한 것이었다. 투표 결과 고희동이 앞섰으나 과반수 획득에 한 표가 부족하다는 장발 측의 주장이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신문에 고희동이 당선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에 장발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대한미술협회를 탈퇴해 별도로 한국미술가협회를 결성했다. 고희동 지지 세력의 핵심은 홍대 미대 교수였던 윤효중이었고, 장발은 서울대 미대 학장이었기에 ‘홍대파’와 ‘서울대파’가 대립하는 모양이 되었다. 이 대립으로 오늘날까지도 ‘서울대파’와 ‘홍대파’라는 파벌 의식이 남아 있다.

장발은 서울대학교 마크<사진>를 만들었다. 국립서울대의 머리글자인 ‘ㄱㅅㄷ’를 상징하는 마크로 글자 주변을 월계관으로 돌렸다. 월계관은 경기의 승리나 학문 등의 업적에서 명예와 영광을 상징한다. 펜과 횃불이 월계관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게 디자인했다. 이는 지식의 탐구를 통해 겨레의 길을 밝히는 데 앞장서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그리고 마크 한복판에는 책 한 권이 펼쳐져 있는데 라틴어 ‘VERITAS LUX MEA’가 적혀있다. 그 뜻은 ‘진리는 나의 빛’이다. 서울대학교는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상을 제정했다. 서울대는 그 상의 주인공으로 장발을 선정했다. 그리고 서울미대 교수들과 동문은 장발 교수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뜻을 모아 동상을 제작해 교내에 세웠고, 서울대 미대 갤러리를 장발의 호를 따서 ‘우석홀’이라 이름 붙였다. 서울대 발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장발에게 학교와 교수 그리고 제자들이 바치는 존경의 오마주였다.



▲ 1975년 작 나비가 있는 자화상. 작품 속 나비는 부활을 상징한다.




부활의 소망 담은 초상화 남기고

4·19 혁명이 일어났다. 장발은 ‘미대 권력’으로 찍혀 퇴진 운동의 대상이 되었다. 미술대학 운영에서의 권위 의식과 카리스마가 문제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학생 혁명 전에 이미 장발은 이탈리아 특명전권대사로 내정되어 현지 발령 대기 중이었다. 그러나 5·16 군사 정변으로 안타깝게도 중단되었다. 장면 총리가 실각하자 장발은 한국 화단에서 공식 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세인트 빈센트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하며 지내다가 다시 붓을 잡고는 성화와 추상화를 그렸다. 그때 그린 자화상 한 점이 전해진다. 그 작품은 현재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 소장하고 있다. 줄 처진 셔츠를 입었다. 자세는 측면이다. 그런데 고개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깨끗이 빗어넘긴 머리에는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보인다. 굵은 뿔테 안경테 밑으로 보이는 둥근 눈에서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오른쪽엔 호랑나비 한 마리가 힘차게 날아오르고 있다. 나비는 부활을 상징한다. 미국에서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고 싶은 소망을 담은 것 같다.

장발이 삶의 마지막 여정을 보낸 곳은 미국의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라는 도시였다. 장발의 제자인 최종태 요셉(서울대 명예교수)이 스승을 찾아갔다. 스승은 아흔다섯의 나이였다. 최 교수는 방문하기 전에 궁금한 것을 정리해 가져갔다. 김대건 신부와 명동성당 14사도 그림을 그릴 때, ‘성미술전람회’ 때, 혜화동성당을 만들 때의 일화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귀가 어두워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마침 뉴욕 맨하탄 천주교회에서 사목하는 셋째 아들 장흔 신부가 와 있었다. 장 신부에게 메모를 전달하고 대신 여쭤봐 달라고 부탁했으나 답을 얻지 못했다. 집에는 그림 여러 점이 걸려 있었다. 그중에 삼위일체의 성부·성자·성령이 한복에 도포를 입고 갓 쓴 그림이 있었다. 최종태는 그런 형식의 그림은 처음 보았다. 그림 속에는 김효임 골룸바와 김효주 아녜스가 있었는데, 멀리 봄 안개 너머로 남대문이 보이고 성녀가 가는 길가에는 꽃들이 예쁘게 그려져 있었다. 또한, 성모 승천도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상도 있었다. 머리 위에는 화환이 얹혀 있고 손에는 백합이 들려 있다. 예전에 그렸던 성화를 다시 새로운 형식으로 그린 것이다. 이렇게 평생토록 가톨릭 성화를 그린 장발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애를 마쳤다. 장발은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으로 진정 한국 가톨릭 미술의 선구자였다.



참고자료 : ▲가톨릭평화신문. ‘장발 화백의 미공개 ‘김대건 신부 초상화‘, 수원교구에 기증.’ 2022.7.17. ▲가톨릭신문. ‘장발 화백(상)’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2016.5.8. ▲가톨릭신문. ‘장발 화백(중)’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2016.5.15. ▲가톨릭신문. ‘장발 화백(하)’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2016.5.22. ▲가톨릭신문. ‘한국 화단의 거장 우석 장발 선생’. 특별초대석. 1997.1.12. ▲경인일보. ‘서양화가 장발’(인천인물 100인). 2005.10.20.▲정영목. ‘장발평전(1946-1953)-https://s-space.snu.ac.kr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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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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