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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교구 온수본당 오두리공소와 고능리공소(사진)는 메리놀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강화도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반에 설립한 공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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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두리공소. |
부처님의 은혜를 입은 땅이번 호에는 인천교구 온수본당 관할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오두리ㆍ고능리공소 두 곳을 소개한다.
강화군 불은면에는 고려 시대에 지은 자은사(慈恩寺)라는 큰 절이 있었다. 이 절이 융성하자 사람들은 그 일대를 부처님의 은혜를 입은 땅이라 해서 ‘불은’(佛恩)이라 불렀다.
불은면에는 강화의 해안을 경계하던 조선 시대 12진보 가운데 광성보와 덕진진이 있다. 1658년 효종 9년 때 설치된 광성보는 1745년 영조 21년에 다시 고쳐 지어 성문을 만들고 안해루(按海樓)라 했다. 광성보는 1871년에 발생한 신미양요의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신미양요 당시 광성보는 미군이 상륙하기도 전에 함선의 포격으로 초토화된 진지였다. 하지만 1866년 병인양요 때 광성보에서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는 어재연이 포격을 피할 안전한 장소에 군사들을 피신시켰다가 상륙하는 미군에 맞서 싸워 전공을 세웠다.
덕진진은 1666년 현종 7년에 설치됐다. 손돌목돈대와 덕진돈대를 관할하던 덕진진 역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격전지였다. 병인양요 때에는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물리쳤다. 신미양요 때에는 미군 함대와 포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신미양요 종전 후 흥선 대원군은 덕진진에 해문방수비(海門防守碑)를 세웠다. 이 비에는 “바다의 문을 막고 지켜서 다른 나라의 배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하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는 글이 새겨져 있다.
부처님의 은혜를 입은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본격적으로 선포된 것은 1950년대 후반이다. 1958년 강화도 첫 본당인 강화본당이 세워진 이후 이듬해 1월 불은면 오두리에 공소가 설립됐다. 또 같은 해 고능리에서 나근길(이레네오)씨가 고능리에 교리실을 마련한 뒤 예비 신자들을 모아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강화 냉정리와 초지공소를 소개하면서 어느 정도 강화도 역사를 정리했으니 이번 호에는 강화도에서 사목했던 메리놀외방선교회에 간략히 소개하려 한다. 메리놀회의 활동을 알아야 오늘날 강화도 교회의 삶의 자리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씨앗 뿌린 벽안의 사제들해방 이후 1950년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가톨릭구제회를 비롯한 미국 민간구호단체들이 미화 280만 달러를 지원했다. 그중 200만 달러 이상이 가톨릭구제회에서 보내왔다. 1952년 5월 20일 메리놀회 한국지부장이며 평양교구장 서리인 캐롤 신부는 고국을 방문해 한국의 전쟁 참상을 설명하고 도움을 호소했다. 미국 교회는 많은 구호 성금과 의약품들을 보내줬고, 이들 물자는 한국 교회 재건에 큰 힘이 됐다.
1958년 10월 인천과 부천 그리고 38선 이남의 황해도에 소속된 도서 지방을 관할하는 인천감목대리구가 설정됐고, 메리놀외방선교회가 그 책임을 지게 됐다. 메리놀외방선교회는 1911년 6월 윌시 신부와 롤리 신부에 의해 설립된 미국 교회의 첫 번째 외방선교회로 아시아 지역 특히 중국 선교를 지향했다. 메리놀(Maryknoll)은 ‘마리아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교황청 포교성성(현 복음화부)은 1922년 메리놀외방선교회에 평안도 지역 선교권을 맡겼다. 1923년 5월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진출했고, 이듬해 10월 6명의 메리놀 수녀회 수녀들이 파견됐다. 이후 1936년까지 30명의 선교사가 파견돼 평양교구 발전에 헌신적으로 이바지했다.
평양교구 메리놀회 선교사들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1942년 6월 전원 미국으로 강제 추방됐다. 이후 해방이 되자 1947년 1월 한국에 다시 진출해 서울 명동 주교좌 대성당에 머무르며 한국 교회와 미 군정 사이의 주요 업무를 담당했다. 또 그해 8월 초대 평양교구장이었던 번 주교가 초대 교황청 순시자로 임명돼 대한민국 정부와 교황청과의 정식 외교 관계 수립에 힘을 보탰다.
북한 땅이 공산화되면서 평양교구 지역으로 다시 갈 수 없었던 메리놀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은 1953년 9월부터 충청북도 사목을 담당했다. 그리고 1958년 7월 청주교구 설정과 함께 초대 교구장으로 파디 주교가 임명되면서 메리놀외방선교회는 평양에 이어 청주를 중심으로 다시 선교 활동을 펼치게 됐다.
인천감목대리구가 메리놀외방선교회에 맡겨진 것은 당시 서울교구장이었던 노기남 주교의 부탁에 의해서다. 부족한 사제 수와 교회 재정 때문이었다. 청주교구장 파디 주교는 처음에는 노 주교의 청을 거절했으나 다시금 노 주교가 부탁하자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1961년 6월 6일 인천교구가 설정되고 초대 교구장으로 윌리엄 맥노튼(한국명 나길모) 주교가 임명됐다. 교구 설정 당시 16명의 성직자 모두 메리놀외방선교회 출신이었다.
강화도에는 토마스 맥키 신부가 1959년 제2대 강화본당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메리놀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진출했다. 이후 패트릭 파터슨ㆍ마이클 브란스필드ㆍ존 둔니간ㆍ조셉 룃트게링ㆍ로버트 펠리니 신부가 강화도에서 사목했다. 메리놀외방선교회 신부들은 엄격하고 보수적이었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달리 개방적이고 진취적이어서 지역민들과 빨리 친숙해졌고 선교 활동도 그만큼 활발했다. 특히 1963년 제3대 강화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파터슨 신부는 강화도 복음화에 초석을 놓았다.
약자들에게 주님 사랑을 전하다파터슨 신부는 개펄을 개간해 약 7.8㎢ 농지를 강화도에 정착한 피난민 300여 세대에 나눠줘 농사를 짓게 했다. 또 가톨릭구제회 한국지부로부터 구호양곡과 우유를 받아 가난한 이들의 배고픔을 해소해줬다. 아울러 강화본당에 진료소 ‘사랑의 집’을 열어 매일 250여 명의 환자를 치료해줬다. 그리고 1965년 3월 9000달러를 들여 ‘그리스도왕 의원’을 설립해 강화도 무의촌 지역 주민들에게 많은 의례 혜택을 줬다.
메리놀회 신부들은 신용협동조합을 구성해 강화도 주민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했고, 돼지 신품종을 도입해 공소와 극빈 가정에 배분해 자립에 도움을 줬다. 몇 해 전 강화도 불은면 지역에 구제역이 발생해 많은 가축이 살처분됐는데 돼지 사육의 시작점을 쫓아가면 메리놀회 선교사들을 만날 수 있다.
메리놀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헌신했다. 브란스필드 신부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조직해 교회 가르침에 따라 빈곤한 노동자들을 돌봤다. 그 결과 강화도에서는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이 증가했고 공장마다 노조가 결성돼 노동 시간이 준수되고 임금이 개선됐다. 이에 맞서 심도직물을 비롯한 강화도의 여러 업주는 가톨릭 신자들을 해고하는 등 이른바 ‘강화도 천주교 신자 고용 거부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 교회 주교단은 임시 주교회의를 열고 브란스필드 신부와 노동자들의 정당한 모든 활동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 전국 섬유노조가 투쟁을 선언하자 1968년 2월 강화직물업자협의회는 천주교 신자 고용 거부 등 7개 항목의 결의문을 철회하고 해고 노동자를 복직시켰다. 이 사건은 한국 교회 안에서 사회 정의와 인권 옹호를 위한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한 인식을 고취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온수본당 오두리와 고능리공소는 메리놀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1950년대 말과 60년대 초반에 설립된 공소이다. 오두리 공소는 강화도 불은면 오두리 289-1 현지 땅을 매입해 인천교구가 설정되던 날인 1961년 6월 6일 40㎡ 규모의 건물을 짓고 첫 공소 예절을 드렸다. 이후 강화도에서 사목한 마지막 메리놀회 선교사인 펠리니 신부가 1993년 공소 신축을 승인해 165㎡ 규모의 오늘날 오두리 공소를 완공해 6월 16일 나길모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했다. 주일 미사는 매월 첫째ㆍ셋째 주일 오전 8시에 있다.
강화군 불은면 고능리 152-2번지 자리한 고능리 공소는 1966년에 대지를 매입해 공소 건물을 지었다. 이후 제10대 강화본당 주임 장희영 신부가 1981년에 공소 주변 대지 610㎡를 매입해줬다. 1997년 11월 오늘날 고능리 공소가 완공돼 나길모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했다. 언덕 위 적벽돌로 아담하게 지은 고능리 공소는 마을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예쁜 풍광을 갖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