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 公所] (7)춘천교구 포천본당 신평공소
▲ 포천본당 신평공소는 1974년 한센병 환우들이 정착해 설립한 공소이다. 현 공소는 산업단지 조성으로 인해 새로 옮겨 2015년 봉헌했다. |
한국 교회 신앙의 요람지
경기도 포천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이 선포되고 가톨릭 신앙의 씨앗이 뿌리내린 것은 한국 교회 창립 시기와 함께한다. 경기도는 한국 교회 창립 초기부터 신앙의 중심지였다. 서울이 가톨릭 신앙 공동체가 처음으로 형성된 곳이라면 경기도는 가톨릭 신앙을 충청도와 전라도로 전파한 신앙의 요람지이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체포된 가톨릭 신자 692명 가운데 88가 서울ㆍ경기ㆍ충청 지역에 살고 있었다. 교회 창립 초기 포천 지역에 살았던 대표적인 신자는 신유박해 순교자인 복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홍인(레오) 부자이다. 1839년 기해박해 이후 19세기 중반 포천, 양주, 파주, 고양, 송도 등 경기 북부에는 경기도의 여느 지역보다 더 많은 신자가 거주했다.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개성 신자들이 포천 선단리 해룡마을로 옮겨와 교우촌을 이루면서 포천 지역 첫 공소를 설립했다. 이후 내천, 맑은데미, 송우리, 고일리, 오가리, 새묵이, 화대리, 운천, 백의리, 가산, 신평 등에 공소가 설립됐다. 현재 포천본당 관할로 남아 있는 공소는 ‘신평공소’뿐이다.
한국 교회 안에는 한센병 환우들이 정착 마을을 일구고 공소를 설립해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곳이 적지 않다. 신평공소도 그중 한 곳이다. 1970년대 초반 한센병 한우들이 한두 명씩 포천군 신북면 신평3리에 모여들었다. 이들 가운데 최억조(마르티노)씨가 1974년 자기 집에서 신자 10명과 함께 첫 공소 예절을 드렸다. 한센병 환우들의 신앙 공동체가 신평3리에 형성되자 당시 포천본당 주임 조선희(Philip. J. Crosbie) 신부가 한 달에 한 번 이곳을 방문해 주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신평공소의 역사가 시작됐다.
골롬반회 조선희 신부의 헌신
조선희 신부는 지금도 춘천교구민들에게 존경받는 사목자여서 그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다. 호주인으로 성 골롬반외방선교회 출신 조선희 신부는 1939년 12월 사제품을 받고 1940년 한국 선교사로 파견돼 홍천본당 보좌로 사목을 시작했다. 1941년 12월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신호탄으로 미국과 전쟁을 벌이자 조선의 서양 선교사들은 모두 연금됐다. 조 신부도 5개월간 연금과 투옥 생활 후 강제 출국 됐다가 해방 후 1947년 2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홍천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조 신부는 홍천에서 북한 인민군에게 체포됐다. 훗날 초대 춘천교구장 주교가 되는 토마스 퀸란 신부와 함께 북으로 끌려가 평양 인민교화소에 투옥됐다가 1950년 겨울 중강진수용소로 이감됐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끊임없이 이어진 ‘죽음의 행진’으로 많은 선교사와 피랍인, 포로가 길 위에서 죽거나 총살됐다. 조 신부는 휴전 때까지 3년간 중강진수용소 생활을 했다. 750여 명 수용자 가운데 500여 명이 사망한 수용소 생활에서 풀려난 조 신부는 1953년 5월 본국으로 귀환했다가 몸을 추스른 다음 다시 1954년 8월 세 번째로 한국에 입국해 자신의 사목지였던 홍천본당으로 돌아왔다.
조선희 신부는 1969년 5월 한국 교회 교구 관할 구역 조정에 따라 포천본당이 서울대교구에서 춘천교구로 이관되자 주임 신부로 부임했다. 당시 포천은 가난한 이들이 많았다. 조 신부는 치료비가 없어서 병원은 물론 약조차 구하지 못하는 이들을 신자 비신자 가리지 않고 치료받게 해 주었다. 그에게 도움을 많이 주던 미군 병원이 부산으로 이전하자 환자들을 도와줄 길이 없게 된 조 신부는 임종자를 위한 호스피스 사도직을 하는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에 포천 분원 설립을 요청해 오늘날 포천 모현 호스피스의 전신인 ‘평화의 모친 의원’을 운영하게 했다.
조 신부는 늘 청빈하게 살면서 신자들을 사랑했다. 그는 특히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희망을 전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간성본당과 신남 준본당에서 사목한 후 노쇠해지자 한국 신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며 1998년 고향인 호주로 돌아가 생활하다 2005년 3월 선종했다.
포천 신평공소 역시 한센병 환우에 대한 조선희 신부의 각별한 사목 배려로 안정적으로 뿌리내렸다. 한센병 환우 신자들은 공소를 짓기 위해 포천군 신북면 신평3리 220번지 땅을 매입했다. 중장비가 없어 곡괭이로 암반을 깨고 부수는 데에만 1년이 넘게 걸렸다. 1980년 박 토마 주교 주례로 축성식을 한 신평공소는 한센병 환우 신자 50세대 100여 명의 신앙 보금자리가 됐다. 신평공소는 1988년 수녀원을 신축해 말씀의 성모영보수녀회 수도자들을 초빙할 만큼 번성했다. 수녀들은 공소 신자들의 교리교육과 신앙 활동을 도왔다.
한센병 환우들은 교구와 포천본당의 도움으로 새 공소도 마련했다. 안타깝게도 새 공소는 2011년 이 지역에 섬유와 피혁 중심의 산업단지 조성으로 부지가 편입되면서 허물어야만 했다. 신평3리 한센병 환우 정착촌과 일대 마을들의 물론 신자들은 40여 년 가까이 살아왔던 신앙의 터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거대한 공장들이 들어섰다. 출ㆍ퇴근과 점심때만 사람이 북적일 뿐 온종일 사람 왕래가 드문 곳이 됐다.
▲ 포천본당 신평공소 신자들의 신앙 열성은 대단하다. 한센병 환우들이 일군 이 공소는 한 때 100여 명 신자들로 넘쳐났다. 지금은 인근 산업단지에서 일하는 나이지리아 이주노동자들을 초대해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사진은 신평공소 내부. |
2015년 새롭게 공소 마련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신평공소 한센병 환우들에게는 세상의 시련을 이겨내는 신앙의 내성이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포천시 신북면 장자마을2길 18 현지에 새 땅을 마련해 2015년 5월 아담하지만, 성채와 같은 단단한 새 공소를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 주례로 봉헌했다. 철제건물 구조에 적벽돌로 마감했다.
신평공소에는 매 주일 오전 10시 주일 미사가 봉헌된다. 포천본당 주임과 보좌 신부가 방문해 한센병 환우들에게 성사의 은총을 지속해서 전해주고 있다.
신평공소에는 한센병 환우들에게 동병상련의 벗이 매 주일 찾아온다. 산업단지에서 일하고 있는 나이지리아 이주 노동자들이다. 무지한 사회 통념으로 정착촌을 이루며 이방인처럼 살아야 했던 한센병 환우들이 진짜 이방인들을 환대하고 있다. 신평공소 신자들은 주일 미사에 참여하러 온 이주 노동자들과 미사 후 다과를 나누고 행사에도 초대해 가족처럼 보살피고 있다.
한 때 빈자리가 없을 만큼 공소를 가득 채운 신자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둘 하느님 품에 안겼다.
신평공소 신자는 현재 23명이다. 초기부터 지금까지 신평공소를 지키고 있는 한센병 환우는 그중 18명이다. 이들 모두 연로하지만 지금도 공소를 버티는 주추와 기둥 같은 존재이다.
전종국(스테파노) 신평공소 회장은 “지난 3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동안 많은 신자 분이 돌아가셨다”고 안타까워했다. 전 회장은 “신평 신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신앙에 대해선 한결같이 열성 가득하다”며 “공소 활성화를 위해 이주 노동자 돌봄에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