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오랜 기간 고착화된 아리스토텔레스적·프톨레마이오스적 관점에서 벗어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인물은 바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1473~1543)입니다. 폴란드의 성직자(바르미아교구의 의전사제)이자 탁월한 천문학자였던 코페르니쿠스는 서기 150년 무렵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해서 무려 1400년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던 천동설을 대체하는 혁명적 이론인 지동설(태양 중심설; heliocentrism)을 「천구의 공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라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1543년에 발표합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 새로운 이론은 기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가지고 있던 중대한 문제점들(행성들의 배열 순서와 그것들의 주기에 관한 문제 및 행성들의 역행 운동에 대한 문제)을 태양 중심 모델을 통해 나름 해소해 주었으며, 이로써 토마스 쿤(Thomas S. Kuhn·1922~1996)이 주장한 대로, 최초의 천문학적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의 예로서 현재까지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구의 공전에 관하여」라는 이 책은 사실 당대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라틴어로 쓰였기 때문에 유럽 어느 누구나 다 읽을 수 있는 책이기는 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변두리에 해당하는 폴란드에서 이 책이 출판되었고, 이 책이 출판되기 전에 코페르니쿠스는 그렇게 세상에서 잘 알려진 천문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는 가톨릭교회에 속한 인물로서 이 책이 발표됐을 때에 본인이 당시의 교회로부터 어떤 식으로 공격을 받게 될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주장하던 지동설의 내용은 그가 살던 당시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천동설을 반박하는 내용으로서 전통적인 교회의 입장과는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혁명적인 이론이 교회 당국에 의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예상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사람이었던 코페르니쿠스는 「천구의 공전에 관하여」의 집필을 완료한 후에도 계속해서 출판을 망설였습니다. 당시 뇌졸중으로 고생을 하던 그는 결국 1543년 그 책이 출판된 지 한 달 뒤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대다수 사람들은 이 책의 출판 자체를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은 그 당시로서는 그다지 혁명적인 일은 아니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전환(Copernican Revolution)이라는 말을 요즘 들어서 많이 씁니다만, 그 말은 저명한 과학사학자인 토마스 쿤이 1950년대에 와서 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책 「천구의 공전에 관하여」를 통해서 무엇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가 정말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썼다’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만, 사실 그것보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도입한 대심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그가 큰 불만을 가지면서 이걸 없애버리고자 시도한 책이 바로 「천구의 공전에 관하여」라는 책입니다. 그가 보기에 우리의 우주가 이렇게 복잡하게 운행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죠. 그래서 그는 이 대심 개념을 없애버리면서 행성들의 궤도를 엄밀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한 끝에 태양을 중심에 두고 지구가 그 주변을 공전한다고 하면 조금 더 모델이 간단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지동설은 기존의 천동설과 비교할 때 큰 장점이 있었습니다. 우선 ‘행성의 역행 운동’을 아주 쉽게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기존의 천동설은 지구가 중심에 있고 태양을 비롯한 나머지 행성들이 지구 주위를 돌면서 역행 운동을 하는 것을 설명해야 했기 때문에 반드시 주전원을 고려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지동설 모델은 (첫 번째 그림에서 보시듯이) 태양이 가운데 있고 지구가 원 운동을 하면서 다른 행성을 들여다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태양과 다른 행성의 위치가 스위칭되면서 이 역행 운동이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또 하나 중요한 천문학의 문제가 있었는데 이 문제를 지동설이 쉽게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수성과 금성 문제’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수성과 금성은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 그리고 태양이 지고 난 직후에만 잠깐씩 보이는 예외적인 행성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금성을 샛별이라고 불렀는데, 이렇게 샛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새벽에 금성이 잠깐 보이기 때문이었죠. 이렇듯이 수성과 금성은 해가 진 직후 또는 해가 뜨기 직전에만 잠깐 보이는 그런 특징이 있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때까지도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따르면 이 문제는 간단하게 설명이 됩니다. (두 번째 그림에서 보시듯이) 바로 수성과 금성의 궤도가 지구보다 더 태양에 가깝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태양이 진 직후에만 잠깐 어두워졌을 때 잠깐 보이고,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에 밝아지기 전 약간 보이는 것은 이 두 행성의 궤도가 태양에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모델이 반드시 모든 면에서 성공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등속 원 운동’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절대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대심을 없애고 태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놓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대신 나머지 개념들인 이심, 대원, 주전원과 같은 개념들은 그냥 그대로 두었습니다. (세 번째 그림에서 보시듯이) 대원은 물론이고 주전원도 한 행성에 하나가 아니라 세 개, 네 개씩 갖다 붙여 놓으면서까지 ‘등속 원 운동’에 집착을 한 나머지, 그는 기존의 방법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려 시도한 셈이 되었습니다.
결국 「천구의 공전에 관하여」는 태양과 지구의 위치만 바꾸었을 뿐 그걸 제외하고는 전혀 수학적으로 덜 복잡해진 것도 아니었고 뭐가 더 개선된 건지도 알기 어려운 책, 사실상 프톨레마이오스의 책과 두드러진 차이가 그다지 없어 보이는 책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할 뿐만 아니라 하루 사이의 밤과 낮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지구의 자전이라는 개념까지 도입을 해야 했기 때문에 땅이 움직인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믿기지 않는 복잡한 모델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지동설이 이탈리아의 저명한 천문학자 한 명 때문에 가톨릭교회 안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 천문학자는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입니다.
김도현 바오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