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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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묻고 따질 게 많습니다

특별상 - 가톨릭학교법인상 김자영 아기 예수의 데레사 군종교구 성 비안네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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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묻고 따질 게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를 멈출 수가 없는 겁니다.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하신다는데, 대체 그 대단한 아버지 뜻이 뭔가요? 청하면 이루어주신다 하셨는데. 주님 왜 그러셨어요!

‘아멘’은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뜻이라면서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이루어 주신다면서요.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아버지가 보시기에 제 믿음의 크기가 너무 작던가요? 아버지 하느님 주님, 성모님 대답 좀 해주세요. 네?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강렬하게 믿고 의지했던 주님께 느낀 배·신·감. 요즘 저는 감히 주님께 시건방지게 따져 묻고 있습니다. 제 아버지를 너무 갑작스럽게 너무나 비통하고 처절하게 잃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그토록 극강의 고통을 주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평온하게 가족과 이별할 수 있도록 해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렬하게 믿고 의지했던 주님께서는 저와 제 가족에 감당하기조차 힘들만큼의 고통을 겪게 하면서 아버지를 데려가셨습니다. ‘삐이~’ 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심장이 멈추면서 핏기 사라진 창백해진 아버지 얼굴을 쓰다듬고 목놓아 울면서 저는 주님께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성당을 참 열심히 다녔고, 지극정성을 다해 기도했고, 독학으로 반주를 배워 기쁜 마음으로 책임과 사명감으로 반주 봉사를 했고, 저에게 상처 주는 사람조차 주님께서 ‘용서’하라 하시어 ‘평화’의 마음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왔는데, 아버지를 빼앗기면서 이런 노력이 하느님과 주님, 성모님께 무시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가 누군지도 모르고 받았던 세례, 인생 이벤트로 끝날 뻔했던 세례식, 세례식 6개월 뒤 찾아온 엄청난 시련, 스스로 미리내성지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시작으로 1년에 믿음이 천 년씩 깊어질 정도로 신심을 쌓아갔던 열혈신자….

저는 2014년 3월 29일 가톨릭성모병원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하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세례 받고 은총 받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라고 해서 미신을 믿듯이,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명도 신부님께서 10월이 생일이니 10월 1일 축일인 ‘소화 데레사’로 하면 좋겠다고 추천해주셔서 성녀 소화 데레사가 누군지도 모른 채 저는 ‘소화 데레사’가 됐습니다. 세례식도 이벤트로 끝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가을 저에게 엄청난 시련이 찾아왔고, 제 발로 경기도 안성 미리내성지 성당을 찾아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고해성사는 제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시간인데, 제 억울함을 호소하는 시간이 됐습니다. 그럼에도 신부님께서는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숨은 것도 알고 계신 주님은 자매님의 시련 고통을 알고 계시니 그분을 믿고 의지하면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위로해주셨고, 그 뒤로 저는 강렬하게 주님을 믿고 따르게 됐습니다. 주일은 물론이고, 평일에는 절두산과 새남터 성지 미사를 다녔고, 매일 묵주기도를 했습니다. 주님과 성모님을 의심의 여지 없이 무조건 굳건히 믿고 따르면서 ‘나의 신심은 1년마다 천 년을 성당 다닌 믿음 만큼 깊어지고 쌓여간다’고 자부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열혈신자로 성장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상상도 못 했던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버지가 쓰러지던 그날도 성당 반주를 하고 쎌기도에 참여했지만, 그 어떤 사인도 해주지 않으셨던 주님.

2022년 2월 18일 금요일 새벽 아버지가 허리가 아프다고 극강의 통증을 호소하시더니 다리가 마비됐습니다. 아버지는 협착증 수술만 3번을 하셔서 허리가 안 좋으셨기 때문에 가족들 모두 허리가 다시 탈이 났나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당시, 코로나19 환자가 급증으로 119를 불렀지만, 미열이 있다며 응급실도 못 간다고 했습니다. 열만 떨어지면 병원에 가보자 결론을 내리고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저 역시 일상을 보냈습니다. 주일 미사를 드리고, 반주를 했고, 저녁에는 쎌기도 모임에도 참석했습니다. 아버지는 끙끙 앓고 계셨지만, 저는 주님과 함께하며 아버지 병이 낫게 해달라는 기도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저에게 아버지가 상태가 위독하다든지 빨리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한다든지 이런 힌트조차 전혀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정말 위독해지셨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아버지가 평소 다니시던 분당서울대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하루 코로나 확진자가 30만 명에서 60만 명까지 급증하던 시기라서 응급실은 초만원이었고, 아버지는 24시간 동안 휠체어에 앉아 대기만 하다 겨우 침대에 누우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로 아버지는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병명은 척추뼈에 염증이 생긴 척추염이었고, 척추를 타고 염증이 퍼지면서 패혈증을 일으켜 여러 장기가 손상됐습니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인데도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고, 응급실에서만 5일을 계시다 신장은 망가지고 중환자가 되셨습니다. 응급실에 대기하면서 아버지는 “의사가 고쳐주겠지?”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아빠 면회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제가 강렬하게 믿고 의지하는 주님께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온 정성을 다해 간절히 기도하면 이루어질 거라는 강렬한 믿음을 갖고 중환자실 앞에 무릎을 꿇고 묵주를 잡고 기도를 했습니다. 집에서 분당서울대병원은 왕복 100㎞인데, 면회도 안되는 병원을 매일 찾아가 중환자실 문앞에서 절박하게 기도했습니다

늘 하던 ‘매듭을 푸는 성모님과 함께하는 9일 기도’를 시작으로 ‘영원한 도움의 성모 매일 기도’ 상황이 급하니 ‘천사들에게 바치는 긴급한 기도’까지 묵주를 꼭 손에 쥐고, 기도에 기도를 이어갔습니다. 아버지가 응급실로 들어가시기 전 “목이 마르니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다” 하셔서 ‘오렌지 주스’를 사드린 게 전부였습니다.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많이 못 했는데 이대로 떠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절박했습니다. 남들이 보든 말든 의사, 간호사들이 오가든 말든 침대가, 기계가 들락거리는 중에도 중환자실 문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한 일주일 정도 매일 기도를 했을까요? 한 남자분이 기도하던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천주교 신자이신가 봐요. 매일 묵주기도 하시던데요.” “네, 맞아요. 아빠가 위독하시고, 제가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어서요.” “아 네. 근데 저 어려운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네? 저에게요?” “네. 위독하신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께 민망하지만, 지금 방금 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저는 베드로인데, 저는 오랜 기간 냉담을 해서요. 잠시 후에 아버지가 나오실 텐데요. 아버지를 위해서 묵주기도 부탁해도 될까요? 그리고 저희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자매님 아버지 쾌차를 꼭 기원할게요. 나으실 거예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하던 기도를 멈추고, 이날 처음 얼굴을 마주한 베드로 형제의 아버지를 위해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기도 중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베드로 형제의 아버님이 나오셨습니다. 하얀 천에 얼굴을 감싼 아버지를 보고 베드로 형제는 목놓아 울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며 계속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이 땅에서 가족을 위해 많은 애를 쓰신 베드로 형제의 아버지가 꼭 천국 가도록 해주세요. 그리고 베드로 형제가 냉담을 마치고 다시 성당에 나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렇게 나는 중환자실 앞에서 처음으로 생전 처음 보는 형제의 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드리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상태가 아주 좋아지진 않으셨지만 1인실 일반병동으로 옮길 정도는 되셨습니다. 제발 이 시간을 잘 견뎌서 가족 곁으로 돌아오시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일반병동에서는 아버지 곁에 어머니가 계실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아버지가 나오던 날, 우리 가족은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면회는 허락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1인실로 이동할 수 있는 그 짧은 순간. 우리 모두는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걸어가면서 아버지의 손을 잡았습니다.

한 달 만에 잡아보는 아버지의 손은 정말 따뜻했고, 아버지는 제 손을 놓칠세라 온 힘을 주어 제 손을 꽉 잡으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기도를 더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희망의 시간은 잔인하게 짧았습니다. 20여 일 만에 아버지는 호흡곤란이 왔고 두 번째로 중환자실로 재입원하셨습니다. 엄청난 시련이 아버지에게 닥쳤습니다.

사지 마비에 목소리까지 잃으시고 굴욕적인 병원생활에 극심한 우울증까지 찾아온 아버지. 아버지의 척추염증이 경추까지 번지면서 목 신경을 건드렸고, 팔다리의 감각을 상실, 결국 사지 마비가 왔습니다. 반복적인 폐렴으로 기관절개를 하면서 아버지는 목소리마저 잃으셨습니다. 평소에 말씀하기 좋아하셨고, 글씨는 천하 명필이셨습니다. 매일 일기를 쓰셨고, 응급실에서 의식을 잃기 전까지 치료받은 과정, 의사들 이름까지 적으실 정도로 총명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팔다리 마비에 말 한마디 못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정신은 너무나 온전하셨습니다. 중환자실에 사경을 헤매는 환자들이 대부분인데 그 환자들 틈에서 아버지는 몸을 옴짝달싹 못한 채 온전한 정신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봐야 했고, 간호사들이 기저귀를 갈아주고, 이리저리 몸을 굴리는걸 감내하셔야 했습니다. 면회가 금지인데 어떻게 알았냐구요? 결국, 아버지께 극심한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모든 치료를 거부하셨고 보다 못한 의료진께서 저와 아버지를 단 30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입 모양으로 아버지 말씀을 추측했고, 겨우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다. 병이 나을 줄 알았는데 이제 다 틀린 것 같다’며 절망하셨습니다.

“주님! 아버지에게 모든 걸 빼앗아 가시면 어쩌란 말입니까!” 물고기처럼 입 모양만 뻐끔거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애써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저는 펑펑 울었습니다. 아빠가 제 눈물이 더 슬퍼할까 봐 꾹 참았지만, 쏟아지는 눈물을 거둬낼 길이 없었습니다. 기도를 철저히 외면한 주님이 원망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운명이 여기까지라면 이렇게까지 극강의 고통을 주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큰 고통을 겪으신 분인데, 생의 마지막까지 고통을 주시다니요.

아버지는 평안북도 신의주 출생으로 6ㆍ25 전쟁 1ㆍ4 후퇴 때 피난 나와 움막을 짓고 사셨습니다. 당시 나이가 고작 7살. 신의주에 남은 큰형, 둘째 형과는 이산가족이 됐고, 아버지는 9ㆍ28 수복 때 총 맞아 돌아가시고, 남은 형제들은 굶어 죽거나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12살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셔서 홀로 세상과 맞서야 했습니다. 다행히 성격이 적극적이고 인내심이 많으셨던 분이라 이를 악물고 회사사환, 목욕탕 아르바이트, 신문 배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고 대학까지 졸업하셨습니다. 고생만 하다가 결혼을 하고, 가족다운 가족을 이루며 너무나 행복해하셨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세상 ‘가족’이 전부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신데, 아버지의 투병과정은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세상 전부인 가족은 면회금지로 얼굴조차 만나지 못했고, 외롭고 쓸쓸하게 홀로 중환자실에 계셔야 했습니다. 세상 천하 나쁜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데, 사는 내내 선하기만 하셨던 아버지에게 왜 이토록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주시는지 저는 주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팔다리가 마비된 후 아버지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됐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니까 폐렴은 반복됐고 신장상태도 더 나빠지셨습니다. 감각 없는 손발은 퉁퉁 부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겁이 덜컥 나면서 두려웠습니다. 이렇게 아버지를 보내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주님이 원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습니다.아버지에게는 겨울마다 즐겨 입으시는 남색 패딩이 있습니다. 너무 오래 입어서 소매 끝동이 터지고, 제가 맨날 버리라고 했던 옷입니다. 새 패딩을 사드렸는데도 낡은 패딩이 가볍고 따뜻하다며 고집을 꺾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낡은 패딩을 입고 다녔습니다. 아버지의 체취가 가득 담긴 그 낡은 패딩을 입고 중환자실은 물론 절두산, 새남터 성지 등 성지를 찾아다니며 미사를 봉헌하고, 초를 봉헌하고, 김대건 신부님, 마더 데레사 수녀님 동상 앞에서 그분들의 손을 부여잡고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아버지의 낡은 패딩을 입은 제 사연을 듣고 신부님들도 정성을 다해 안수해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기도를 올렸고, 이것만으로도 부족한 것 같아서 성경과 기도문 필사도 시작했습니다. 성물방에서 좋은 기도문들을 죄다 구입해서 기도를 올렸습니다. 매듭을 푸는 성모님과 함께하는 9일 기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이콘으로 드리는 9일 기도, 프라그의 아기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 천사들에게 바치는 긴급한 기도, 환자를 위한 치유의 기도, 부모님을 위한 기도를 매일매일 드렸고, 치유의 수녀님으로 알려졌다는 수녀님을 찾아가 특별 기도도 부탁했습니다. 저 혼자만의 기도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성당 공동체에 기도를 부탁드리고, 평소 연락도 잘 안 하던 신부님 수사님께도 연락을 드려서 염치없지만 기도를 부탁드렸습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께서 당장 아버지에게 대세를 드리라는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코로나로 면회가 금지되면서 병자성사도 할 수 없는 상황인데 ‘대세’를 드리라니…. 게다가 저는 대모도 서본 적이 없고, 대세는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워낙 급하다 보니 저는 어떻게든 아버지에게 대세를 드려야 했습니다. 문제는 면회가 금지라 아버지를 만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나바위성당에서 구입한 성당 그림이 그려진 손수건에 물을 묻히고 간호사에게 사정사정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제가 세례를 드려야 해요. 아버지에게 시간이 없어서요. 금방 끝납니다. 간곡히 부탁드려요.” 처음에 간호사는 단호히 ‘안 된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매달렸습니다. “아버지 세례 드리게 해주세요. 1분이면 됩니다. 딱 1분만요.” 오랫동안 아버지를 봐왔던 간호사는 울며 매달리는 제 간절한 눈빛을 읽고, 단 1분을 허락해주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대세를 드리는 시간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마련한 세례명은 12월 29일이 축일인 ‘다윗’. 아버지가 12월생이기도 하고, 아버지는 우리 집의 ‘왕’이시니 다윗 왕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다윗의 후손이시고 저 또한 다윗의 후손이니까요. 허락된 단 1분의 시간에 저는 대세를 끝내야 했습니다. 아 그런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물을 묻혀 준비해간 손수건이 사라진 것입니다. 시간은 흐르는데 손수건이 사라지다니…. 저는 주변에 있던 솜에 다시 물을 묻혔고, 아버지 이마에 물 묻힌 솜을 콩콩콩 세 번 찍으면서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다윗 김승흠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아빠 세례명은 다윗이고 나는 소화 데레사. 이제 아빠도 주님의 자녀가 된 거에요. 축하해요. 아빠! 내가 아빠한테 방금 세례를 드렸어요!” 아빠는 눈을 끔뻑거리시며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아버지에게 대세를 드리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살아계실 때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성당에서 신부님께 제대로 세례받게 해드릴 걸, 함께 성당을 다니고 성지순례를 할 걸…. 그 짧은 1분의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셨으니, 기적적으로 아버지가 쾌유 되기를 간절히 더 바랐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기적을 일으켜주시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기적을 행한 기록이 그렇게 많은데, 아버지는 기적의 주인공으로 선택받지 못하셨습니다.

주님의 자녀가 된 지 한 달이 지난 6월 15일 아버지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고, 임종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코로나 시기라 허락된 면회는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임종 면회뿐입니다. 아버지는 그토록 좋아하셨던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되셨습니다. 어머니는 임종 면회를 하면서 “뭐가 급하다고 이렇게 빨리 가려고 해. 눈 한 번만 떠봐”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버지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셨는지 아버지의 눈꺼풀이 파르르 움직였고 남아있는 모든 힘을 다해 눈을 뜨려고 애쓰셨습니다. 그리고 눈을 번쩍 뜨셨습니다. 초점 없는 아버지 눈동자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눈물을 쏟아내는 아버지를 향해 어머니는 “사랑해. 당신은 최고의 남편이었어, 최고의 아버지였어.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하지마!” 저 역시 아빠의 숨이 금방이라도 끊어질까 싶어서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자랑스러운 아빠, 나는 아빠 큰딸 자영이. 김자영! 아빠 고마워. 세상 제일 존경해. 다시 태어나도 나는 아빠 딸이다! 아빠 기억해. 부인은 한혜선, 큰아들 김수영, 큰딸 김자영, 막내 김세영 우리 가족은 모두 다섯 명이야. 아빠는 우리 가족의 위대한 왕이고 우리 전부야! 아빠 사랑해! 아빠 인생 대단했어! 최고의 명필, 최고의 재주꾼. 김승흠 만세! 아빠 최고! 진짜 슬퍼하지마!”

2022년 6월 16일 오후 4시. 아버지의 심장은 멎었습니다. 저는 욕심도 많고, 남 욕도 하고, 미워도 하고 맞서 싸우기도 하고, 못된 짓도 했습니다. 기도할 때도 제 바람만 잔뜩이었고, 남을 위한 기도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아버지의 상실은 벌 받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인간이 됐다면, 그게 바로 제 어머니일 정도로 한결같이 선했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분에게 왜 주님은 남편을 빼앗아 가시는 겁니까? 왜요, 왜요!

네, 저도 압니다. 제가 기도를 해도 제가 원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뜻하는 방향으로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신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이 선택하신 것은 ‘아버지의 죽음’이었습니다. 나참 기가 막혀서 주님 제가 좀 비꼬겠습니다. 대체 그 대단한 ‘아버지의 뜻’이 뭐란 말입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날로 저는 모든 기도를 끊었습니다. 주님이 밉다 못해 싫었습니다. 장례식에 신부님과 신자들이 오셔서 미사를 봉헌해 주셨지만, 원망이 가득해 감사한 마음도 잊었습니다. 기도 책들과 각종 기도문 묵주는 처박아 두었습니다. 성경은 다 거짓말이고, 주님은 양치기 소년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천국행에 차질을 빚을까 봐, 아버지 유골함과 묘비에는 천주교 십자가와 세례명인 ‘다윗’을 큼지막하게 새겨두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신경질 내며 대차게 소리쳤습니다. “주님! 아버지 살려달라는 제 기도 외면하셨지만, 대신 아버지 다윗 김승흠 천국으로 잘 안내해주실 거죠? 저 이번엔 믿습니다. 다시는 실망하고 싶지 않아요. 그 정도는 당연히 해주셔야죠! 안 그러면 주님의 찐 열혈신자 영원히 잃으시는 겁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신부님들께 털어놓고, 울며불며 화를 잔뜩 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 중 어느 한 분도 저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저를 위로해주시면서 그럴수록 더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기도를 해야 주님께 왜 그랬는지 따질 수 있고, 마침내 그런 선택을 하신 아버지의 뜻에 대해 응답을 들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듯했습니다. 이미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고,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천국행을 잘 빌어드리고 그 대단한 아버지의 뜻을 알아내려면, 다시 하느님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 게 맞습니다. 저는 다시 묵주를 잡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기도’ 덕분에 아버지의 투병과정을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맞습니다. 아버지께 대세를 드리라고 조언해주신 여현국 디모테오 신부님, 머나먼 남수단 파견 와중에도 꾸준히 기도해주신 최민성 베드로 신부님, 아버지 투병과정 내내 미사마다 봉헌해 주시고 장례 미사 해주신 이응석 요셉 신부님, 아버지의 낡은 패딩을 입은 저에게 안수해주시고 아버지가 위독하다고 할 때마다 즉시 화살기소를 바쳐주신 절두산 원종현 야고보 신부님, 정성스레 안수로 아버지 쾌유를 빌어주신 새남터 백남일 요셉 신부님, 청년을 위한 김치찌개를 끓여주시는 이문수 가브리엘 신부님은 아버지 49재까지 매일 미사봉헌을 해주셨습니다.

먼 이탈리아에서 부제 서품을 준비하셨던 조민호 부제님은 동료 수사님들과 함께 아버지를 위해 기도해주셨습니다, 제가 다니고 있는 군종교구 성 비안네 성당은 규모가 작지만, 참 단단합니다. 아버지 투병 속에서도 저는 성당을 빠지지 않았고, 반주 봉사를 했는데, 신자분들과 ‘함께’ 바치는 기도는 더할 나위 없이 큰 힘이 됐습니다. 이원근 아우구스티노 주임 신부님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뵈었는데, 위령성월 내내 아버지의 영혼을 빌어주셨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통해서 그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었는데, 주님이 제 뜻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해서 기도를 내팽개친 것입니다. 함께 기도해준 분들을 생각하며 저는 다시 묵주를 잡았습니다.

다시 잡은 묵주, 다시 시작된 기도는 이전에 했던 기도와 달랐습니다. 주님께 듣고 싶은 응답이 있으니 묻고 따지는 것은 여전합니다. 다만 원망과 분노로 가득 찬 마음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찾기 위한 여정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되짚어보면 주님이 기도를 무조건 안 들어주시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뤄주신 소망의 크기가 작다 보니, 주님께서 이루어주셔도 제가 체감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매일 ‘감사’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뭔가 일이 잘 풀리면 성호를 그으면서 ‘감사합니다, 주님!’ 하고 속삭입니다. 지속적인 감사의 마음으로 분명 ‘아버지의 뜻’을 찾는 날이, 아버지께 응답을 들을 수 있는 그날이, 제 기도 여정의 마침표를 찍을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성경에는 오만가지 주님께서 행한 ‘기적’에 대한 내용이 있지만, 인생에서 기적을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박한 순간에는 주님께 매달려 기도를 하며, 기적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기적이 일어날 확률은 사실상 ‘기적’ 같은 일이지만 그래도 비빌 언덕이 있다는 것이 어딥니까? 가톨릭 신자의 특권이란 하느님, 주님, 성모님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배경 덕분에 아버지 다윗 김승흠은 천국으로 가셨을 겁니다.

아버지가 묻혀계신 묘소에 가면 풍광이 참 좋습니다. 햇살이 가득한 정오에 가면 아버지 묘비에 새겨진 세례명 ‘다윗’이 반짝반짝 빛이나고, 노을이 질 무렵에 찾아가면 비석 뒤로 붉은 노을이 지면서 세례명 ‘다윗’이 아름다운 빛깔로 물이 듭니다.

다시 기도를 시작하며 기도 책들을 들춰보니 기도 책마다 공통으로 쓰여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지치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기도를 곧바로 들어주지 않으시더라도 더 큰 열정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끈질긴 기도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끈질기게 그리스도를 통해 비나이다,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아멘’ ‘아멘’ ‘아멘’을 더 큰 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목청 높여 ‘제가 청하는 대로 이루어주세요. 하느님께서는 불가능이 없으시잖아요!’ 외쳐도 고집 센 주님께서는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겠지요. 그래도 저는 주님이 질릴 정도로 끈질기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소리 높여 청할 겁니다. 네, 주님이 이기나 제가 이기나 한번 해보겠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나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다 보면, 주님께서도 “무슨 저런 ‘자매’가 다 있나 내가 졌다 졌어” 하시면서 제 뜻대로 해주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주님께서 저에게 이런 말을 건네주시는 그날이 올 것입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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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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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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