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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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54)아름답고 겸손한 신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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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듦과 어른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시청했다. 내친김에 그에 관한 책 「줬으면 그만이지」도 사서 읽었다. 그 다큐멘터리가 많은 사람에게 꽤 깊은 반향과 울림을 주었다는 사실을 페이스북과 신문 칼럼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나에게도 그랬다. 어떻게 한 인간이 자신의 생활 철학과 신념을 지키면서, 조용하고 겸손하며 올곧은 모습으로, 전 재산을 ‘대가 없는 나눔’과 ‘간섭 없는 지원’에 사용할 수 있었는지. 다큐멘터리와 책을 보고 읽은 후, 경이감과 경외감이 교차했다. ‘일상의 성인’, ‘옆집의 성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성숙하게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어려운 세상이다. 어른이 부재하다고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왜 어른이 부재할까. 노년의 시간까지 자기 삶을 견결하게 지탱하는 일이 불가능한 세상이어서일까. 돈과 힘과 지위를 향한 경쟁과 인정투쟁의 장이 되어버린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흔들고, 물질과 감각의 쾌락과 향유를 향한 우리의 감정과 욕망이 점점 더 변덕스러워지며 쉬이 멈출 줄 모르기 때문일까. 물질적 향유의 욕심과 인정 욕망은 늙어가도 식지 않는다. 생의 굴곡진 여정에서 변절과 타락과 퇴행의 모습을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발견한다.

오늘의 세상은 어른을 만들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어른이 되기 어려운 사회 현실 속에서 오히려 더 무결점의 인간, 완벽한 성인(聖人)을 요구하고 있다. 무결점의 인간은 없다. 완벽한 성인도 없다. 삶의 큰 흐름과 방향을, 흔들리는 여정 속에서도, 애써 노력하며 견지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중졸 학력의 한약사,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지 않았던 사람, 이름과 지위를 탐하지 않았던 사람, 마지막까지 다 나누고 평범한 노인으로 돌아간 사람. 그의 약력과 삶의 궤적은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어쩌면 이름과 지위를 쫓지 않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었고 인정투쟁의 갈등에서 발생하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든지 명예를 얻고 지위를 가지게 되면, 놀랍도록 무서운 정보의 세상에서, 시기와 질투에서 나오는 모함과 왜곡의 칼날 앞에 마주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신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건강하고 올곧은 신념을 간직하고 그 신념을 한결같이 실천하는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평생 한약방의 일을 하면서, 지역사회의 교육, 언론, 문화와 예술, 시민운동, 평등과 여성 인권의 문제 등 다양한 영역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그의 어떤 신념에서 기인되었을까.

사건과 경험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신념을 갖게 할 수 있다. 사람은 교육과 문화를 통해 어떤 생각과 신념을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어떤 특정한 사건과 경험이, 교육과 문화적 환경이 신념을 발생하게 하고 그 신념을 실천하게 하는 원동력 될 수 있을까. 숱한 사건을 겪고 다양한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화려한 교육 이력과 좋은 문화적 배경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빈번하게 목격한다.

사건과 경험, 교육과 문화라는 외부적 요소들은 사람의 신념과 태도 형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신념과 품성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들에 반응하고 응대하는 과정에서, 경험을 수용하고 이해하며 체현하는 여정에서 더 많이 형성될 것이다. “인생은 역경 속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어떤 결심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바꾸며 살 수 있다”(「줬으면 그만이지」)고 그는 고백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공적 배움의 기간은 짧았지만, 생의 여정 속에서 늘 주체적으로 배우고 공부하고 성찰하는 자세와 태도로 살아왔다는 것을 그에 관한 책 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실천적 신념은 자발적이고 자율적이고 지속적인 공부와 성찰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일까.


■ 선순환

악이 전파되고 순환되는 것처럼 선도 전파되고 순환된다. 좋은 사람 곁에는 언제나 또 다른 좋은 사람들이 있다. 김장하 선생 주변에는 평범하고 소박한 삶의 방식을 택하는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탁월하고 인상 깊은 사람들도 있었다. 김장하 선생의 초등학교 동창 최관경 교수, 선생의 장학금을 받았던 헌법재판관 문형배 판사, 선생을 세상에 알린 지역 언론인 김주완 기자. 그들의 삶 역시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김장하 선생을 닮아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들 역시 교육자, 법조인, 언론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선생들이었다. 우리 주변에 여전히 좋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김현지 PD와 김주완 기자가 전해 준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는 다양한 공감과 반응을 불러냈다. 어떤 이는 선생의 삶 안에서 “인의에 충실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유교적 수신 윤리와 싸가지”에 대한 자기반성의 감응을 적었다.(문학평론가 김명인의 페이스북에서) 어떤 이는 선생의 삶과 태도를 “학생운동 출신 정치인에 대한 안티테제”로 해석하기도 한다.(김영민, 중앙일보 칼럼) 또 어떤 이는 선생의 이야기 안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는 사회에 대한 믿음, 평범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선한 본성에 대한 믿음, 어떤 간계도 평범한 사람들을 영영 속일 수 없다는 믿음”을 읽어낸다.(위근우, 경향신문 칼럼)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를 어떻게 읽고 해석하고 수용하는가는 각자의 몫이다. 선생의 이야기가 자기반성과 성찰의 힘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될 수도 있고, 삶의 평범한 진실을 발견하는 교훈으로 작동될 수도 있다. 선택은 읽는 독자의 몫이다. 다만 선한 이야기가 선한 방향으로 작용하기를 희망할 뿐이다.


■ 다시, 신앙의 신념

김장하 선생의 삶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모든 형제들」에서 언급되는, ‘사회적 우애’와 ‘세상의 형제애’의 진정한 본보기 같다. 그는 어떻게 형제애와 연대와 돌봄의 윤리를 내면화(신념화)할 수 있었을까. 신앙의 신념은 김장하 선생 같은 사람들을 왜 잘 만들지 못하고 있을까.

성사 참여와 신앙적 사건들의 경험이, 우리가 받는 신앙 교육과 우리가 만들어가는 신앙 문화가 왜 선생 같은 사람을 잘 길러내지 못하고 있을까. 성사와 신앙 교육의 목표는 단순히 윤리적 인간의 형성이 아니어서일까. 신앙이 윤리로 환원될 수는 없지만, 신앙은 당연히 윤리적 인간을 포함하지 않는가.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를 보고 읽으면서 우리 신앙의 신념과 신앙 교육과 신앙 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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