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8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우수상 박현경 베로니카 전주교구 우림본당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10여 년 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앞서 걸어가는 한 아이를 보았습니다. 아이는 느릿느릿 가방문이 반쯤 열린 채로 멍하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얘 가방문 열렸어’라고 말하려는데 순간 울컥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었습니다.

또 한 번은 집 근처 천변을 걷고 있는데 여자아이가 딴짓을 하며 걷고 있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저 멀리 앞서가는 엄마를 못 쫓아가 겁이 났는지 울먹이며 “엄마!”하며 소리칩니다. 왈칵 눈물이 납니다. 그 두 아이를 보면서 저의 어린 시절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내성적이고 숫기 없고, 항상 불안해하며 겁에 질려 멍하게 다녔습니다. 엄마는커녕 어느 누구에게도 도와달라고 소리쳐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저는 길고 길었던 그 어둡던 터널을 이제 막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현재 전북 전주에 살고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숲’이라는 뜻의 초콜릿색 벽돌로 지어진 아담하고 예쁜 성당, 우림성당에 다닙니다.

본당에서 10분쯤 차를 타고 가면 ‘숲정이’라는 성지가 있습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 한켠에 표지석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옛날에는 이곳이 소나무가 많은 숲이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또 가까운 한옥마을에는 기와지붕들 사이로 100여 년 전쯤 프랑스에서 건너온 보두네 신부님이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전동성당이 있습니다.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지만 우리나라 최초 순교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의 순교 터이기도 합니다.

한옥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그리 높지 않은 치명자산(致命者山)이 있습니다. 산 정상에 동정부부 복자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과 그들의 가족을 합장한 순교자 묘와 작은 성당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많은 시행착오 끝에 이 축복의 땅에서 하느님의 은총 속에 저는 지금 평온하게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14,27)를 체험하면서 말입니다.

1973년 춘향이의 고장으로 잘 알려진 남원의 한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저는 1남 7녀 중 여섯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제 밑으로 어머니는 여동생 하나와 우리 집에 유일한 아들, 막내를 낳았습니다. 1년에 열 번 이상 친척들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가부장적인 유교 집안에서 제사와 선산을 물려 줄 아들이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아버지는 무능했고, 성실하지도 못했습니다. 거의 매일같이 술을 드셨고 폭언과 욕설을 퍼붓고 폭력까지 휘둘렀습니다. 그리고 차갑고 자존심 강한 어머니와 계속 싸웠습니다. 그런 어머니는 혼자서 거의 집안일과 제사, 농사일, 자식 키우는 일을 도맡아 하셨습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아이들은 커갔습니다. 상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언니들이 서울 작은 회사에 경리 사원으로 취직하면서 집안에 조금씩 보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역부족이었는지 두 동생은 부모님 곁에 남겨두고, 언니들이 여덟 살난 저와 열두 살 먹은 제 위의 언니를 키우겠다고 서울로 데리고 갔습니다.

연탄을 때는 3평도 안 되는 단칸방에서 다섯 명이 살았습니다. 전교생 다 합쳐 400명이 안 되는 시골학교에 다니다가 한 반에 무려 70명씩 15반까지 있는 대도시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아무도 없는 자물쇠 잠긴 방문을 열다가 소변이 급해 그 자리에서 싼 적도 있었고, 연탄을 갈아야 하는데 연탄끼리 붙어서 떨어지질 않아 아직 채 크지도 않은 손으로 부엌칼을 들고 연탄을 쳐서 떼어 내기도 했습니다. 저보다 네 살 많은, 똑같이 철부지인 언니는 저만 혼자 남겨두고 친구들과 놀러 나가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자주 몸이 아팠던 기억도 있는데, 열이 나거나 식중독에 걸려 몸에 두드러기가 나면 언니들이 올 때까지 혼자 울면서 기다린 적도 있었습니다. 더 힘들었던 건 언니들의 매질과 눈총이었습니다. 이제 스물을 갓 넘긴, 생계를 책임져야 하고 삶에 지친 언니들에게 부모의 마음까지 바란다는 건 역부족이었을 것입니다. 부모님이 절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자신감 없고 자존감 낮은 소극적인 아이로 커갔습니다. 학교 성적은 그런대로 상위권을 유지하였지만 고2 때부터 공부도 어려워지고, 사춘기에 우울증까지 겹쳐 집중력도 떨어지고 계속 시들시들 잠만 잤습니다. 그러나 남원에서 고등학교 때 춘향이로 선발되기도 했던 착하고 예쁜 셋째 언니 덕택으로 가까스로 2년제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졸업하고 작은 출판사에서 교정보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자기 형부가 다니는 큰 회사 홍보실에 취업시켜준다고 해서 그만두고 가보니, 다단계 피라미드 회사였습니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저는 친구랑 같이 있고 싶기도 했고, 거기 있는 사람들의 그럴싸한 허황된 논리에 빠져 얼마 되지도 않은 돈도, 친구도 다 잃고 세월만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우울증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그때는 우울증이란 개념도 모호했고 병도 아니었으며, 병원에 가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고등학교 때부터 쭉 해왔고, 더 무서운 건 칫솔을 들 힘조차 없어지는 무기력증이었습니다. 삶에 대한 의욕도 없고 그렇게 지내다 좀 힘이 생기면 1, 2년 직장 다니다가 또 몇 년 쉬고, 그러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50세가 된 지금 사회생활한 햇수가 10년이 채 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상태가 주기적으로 찾아왔고 집에서 계속 노니까 엄마 대신 언니들 산후조리도 하고 아기도 봐주고 하면서 도무지 희망 없는 삶을 이어갔습니다. 당연히 가족에게 신뢰와 인정도 받지 못했습니다.

성경 속 욥이 자신을 저주하며 말합니다.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욥기3장) 마음속 깊이 부모님과 형제들을 원망했고 제 자신을 미워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을 따라 몇 번 교회에 가기도 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가끔 근처의 교회에 조용히 기도하다 오긴 했지만, 신을 냉소적으로 바라봤습니다.

그러다 2007년쯤엔가 광화문에서 촛불집회가 있었는데 어쩌다 거기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게는 신기하기만 했던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의 실제 모습을 가까이서 처음 보았습니다. 그전까지 가톨릭은 제게는 예술 작품으로서만 접해진 상태였습니다.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그레고리오 성가, 바흐의 교회 음악들, 미술학원에서 서양화 수업 때 배우고 모사해 본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화가들이 그린 성화들에서 말입니다.

신부님들이 미사를 집전하고 수녀님들과 사람들이 그 앞에 앉아서 미사 경문을 외우는 모습을 보았는데, 어떤 경건함과 안정감 같은 게 느껴졌습니다. 어릴 적 학교 가는 길에 선망의 눈으로 봤었던 장미덩굴이 있는 파란 대문의 빨간 벽돌집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저 안에 들어가면 나는 보호받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같이 생활했던 언니들과 대학을 마친 동생들이 모두 독립하거나 결혼을 하면서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직장도 없고 그림만 그리고 있었던 저는 언니들 집을 전전하다 결국 부모님이 계시는 전주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모님은 동생 둘을 공부시키기 위해 전주로 삶의 터전을 옮기셨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식당 주방일, 함바식당, 야채 노점상을 하며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폭군이었고 뜻대로 안 되면 칼과 망치를 휘두르며 위협까지 했습니다.

온갖 고생으로 더 냉랭해지신 어머니는 거기에다 남동생만 끔찍하게 생각했습니다. 오랜 세월 떨어져 살고 절 키우지도 않아서 그런지, 저도 마찬가지였지만 부모 자식 간 서로 정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당하는 어머니 편을 들어 주며 대들다가 맞기도 했고, 온갖 눈총과 폭언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언젠가는 이 집에서 나갈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교회 신자였던 어떤 언니가 준 성경책의 한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후에 찾아보니 신명기 20장의 내용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 중 새집을 짓고 봉헌하지 못한 사람, 포도밭을 가꾸어 놓고 그 열매를 맞보지 못한 사람, 여자와 약혼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라.’ 이 구절을 읽고는 한참을 펑펑 울었습니다. 제게는 집도, 가꿀 포도밭도, 배우자도 없었습니다. 더 가슴 아팠던 건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항상 떠도는, 아집과 삐뚤어진 신념으로만 꽉 찬 실상은 텅 빈 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가까이서 오래 생활해 보니 문득 어머니가 원망스럽지만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예처럼 일하고 아버지께 천대받으며 사신 어머니는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셨습니다. 다른 할머니들처럼 어디 교회라도 좀 다니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나마 성당이 어머니에게 좀 맞겠다 싶었습니다. ‘나도 여기 계속 살 건 아니지만 세례라도 받아놔야겠다’ 이런 생각으로 성당에 등록하고 교리교육을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가 서른일곱 살이었습니다.

막상 성당에 다녀보니 어머니를 성당에 다니게 한다는 건 엄두도 나지 않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리교육 해주신 보좌 신부님을 난생처음으로 그만 짝사랑하고 말았습니다.

문자로 고백했더니 두 번 다시 전화도 받지 않고 피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말도 못하고 죽을 것 같은 힘든 시기를 겪으며, 하느님을 저주하며 냉담자로 돌아섰습니다. 그러다 길에서 마주친 본당 자매님이 제게 성당 안 다니면 더 힘들다고 그러셔서, 정말 더 힘들어서 그냥 별수 없이 성당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엉겁결에 견진성사도 받고, 성서 40주간까지 하면서 성경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울증으로 집중도 잘되지 않는 제가 웬일인지 내용이 머리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모세 5경을 읽을 때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신 규정과 법규가 사랑 가득 담긴 엄마의 잔소리 같았습니다.

복음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고쳐주신 벳자타 연못의 병자, 하혈하는 여인, 등 굽은 여인, 눈먼 사람, 중풍 병자, 나병 환자가 마치 저 같다고 생각되었고 예수님의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약속과 미사 때마다 읊조리는 간절한 한마디,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아 나는 이제 살아봐야겠구나. 여기 다니면 나도 나을 수도 있고, 언젠가는 나도 갈 곳이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상태로 부모님 집에 계속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로든 피해야겠는데 갈 데가 없었습니다. ‘서울로 다시 가자.’ 만기가 된 연금보험을 해약해서 서울역 뒤에 성당 가까운 곳, 허름한 고시원으로 숨다시피 들어갔습니다.

높은 언덕배기 아래 ‘리빙텔’이라는 고시원이었는데 창문이 있었지만 앞 건물에 가로막혀서 낮에도 어두컴컴했습니다. 처음엔 너무 무섭고, 춥고, 좁아서 이상했고, 거기 들어갈 때면 마치 봉분(무덤)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친구들과는 벌써 오래전에 연락을 끊었고, 휴대폰도 아예 없애고 가족과도 연락을 끊었습니다. 며칠을 잤고 계속 울었던 것 같습니다. 지친 엘리야 예언자가 주님께 말합니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1열왕19,4)’

하루는 밥도 먹지 않고 비몽사몽 저도 모르게 뭐라 욕을 하면서 자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어깨가 뭐에 끌리듯 들썩들썩하더니 큰 소리로 “얼른 일어나 용서 빌고 밥 안 먹을래!”라고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잘못했다고 하고 얼른 밥을 챙겨 먹었습니다.

성당은 꼬박꼬박 다녔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요한15,5-6) 이 말씀이 머릿속에서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서 1년 동안을 지냈는데 그때까지 살면서 가장 자유롭고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당연히 보험 해약한 돈이 바닥났습니다. 일을 한다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전주 부모님 집으로 와야 했습니다. 여전히 대낮부터 술에 취해 고함을 지르는 아버지. 방에서 울면서 묵주기도를 했고, 어디선가 좋다는 말을 들어서 103위 한국성인 호칭기도를 멍한 머리로 가까스로 외워서 며칠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핍박은 더 심해졌고 겁도 없이 맞서다가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언니들은 무관심했고 할 수 없이 대모님께 도움을 청하자, 가정폭력상담센터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눈이 펑펑 내리는 12월 겨울 새벽, 엄마에게만 말하고 또다시 짐을 싸서 센터로 갔습니다. 한 방에 4, 5명씩 생활했는데 거기서 한 달을 있다가 못 있겠어서 다시 집으로 왔습니다. 아버지가 잘 때 들어와서 어떻게 할까 무서워 방문까지 잠그고 자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결국 수십 년간 곪고 곪았던 상처가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몇 날 며칠 한숨도 못 자다 한밤중에 숨이 안 쉬어져 근처 사는 여동생을 불러 응급실로 갔습니다. 병원에서 며칠간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공황장애, 불안장애, 수면장애, 불면증, 열병, 두근거림 온갖 증상이 다 나타났습니다. 그때부터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보험은 적용됐지만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이 치료비를 감당했습니다.

그전까지 다른 성당으로 미사를 다녔었는데 버스 타기도 힘들고, 마트가 기도 힘이 들어 집 근처 성당으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고통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일념으로 할 수 있는 내에서 더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리코의 눈먼 이가 부르짖습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38-39) 제 자신이 바닥까지 떨어졌다는 걸 알았습니다.



약 기운 때문에 하루에 절반 이상을 잠으로 보냈고, 몸도 마음도 힘들었지만, 미사도 계속 나가고 구역 모임에도 가고 레지오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 사정을 안 교우들이 저를 따뜻하게 지켜봐 주고, 기도해 주고,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베로니카, 요안나, 스텔라, 엘리사벳, 마리아, 안나, 수산나, 체칠리아, 안젤라, 클라라 자매님…. 불안증으로 너무 고통스러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화하여 도움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싫은 기색도 없이 가라앉을 때까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대화하고 안심시켜주는 말을 해주고, 하느님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성령의 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역장님은 제게 친구가 다닌다는 재속 가르멜회에 입회해 보라고 권유하셨습니다. 세례받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어떤 교우분이 한번 제게 권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앞뒤 재지도 않고, 하느님의 뜻인가 보다 하고 망설이지도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예상치 못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차츰차츰 술을 줄이더니 술을 완전히 끊고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성질이 온순해졌고, 어머니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제게 눈치를 주거나 말을 함부로 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조금 더 다정해지고, 부드러워졌으며, 밝아지셨습니다. 매일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할 만큼 정성스럽게 제게 밥을 해 주십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는 산타로 장식된 케이크를 가운데 놓고 촛불을 켜고 제가 캐럴을 불러 드렸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 기도를 했더니 놀랍게도 두 분이 손을 모으고 눈까지 감으며 같이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제가 달라져서 그런지 형제들도 저를 호의적으로 대했습니다. 제가 부모님 곁에 있어서 안심된다고 고맙다고들 합니다.



병원치료도 계속 받으면서 저를 고통스럽게 했던 증상들이 많이 치유되었고 몇 년간 먹었던 약들도 많이 줄이고 있습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신부님과도 정기적으로 상담도 하고 안수기도도 받았는데,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 져서 돌아오곤 했습니다.

거의 매일 미사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묵상기도, 묵주기도를 하고 성무일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몸도 마음도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재속 가르멜회에서 배운 성인, 성녀들의 삶도 제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삶과 하느님에 대한 열정, 고난과 역경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훌륭한 작품으로 써낸 십자가의 성요한이 그렇습니다.

지난가을에는 마산에 있는 가르멜 수도원에 피정을 다녀왔습니다. 오가는 길에 형형색색 물들기 시작한 풍경이 마치 안개가 걷힌 듯 새롭고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렇게 마음에 편안함을 느낀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항상 내부의 적, 외부의 적과 싸우느라 전쟁터 같았던 제 영혼의 안식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제야 집에 온 것 같았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7,38) 푸른 식물을 제 손으로 키우고, 활동량을 늘려가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저를 더 많이 표현하고 하느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삶의 의욕이 샘솟고 저 하늘의 별이라도 딸 만큼 힘이 생겼습니다.

매일매일이 제 생애 최고의 날입니다.



J.D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학교와 가정에서 이해받지 못한 주인공 홀든은 순진무구한 어린 여동생 피비에게 말합니다.

“나는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조그만 어린애들이 어떤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항상 눈앞에 그려 본단 말야. 몇천 명의 아이들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곤 나밖엔 아무도 없어. 나는 아득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은 누구든지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얼른 가서 붙잡아 주는 거지. 애들이란 달릴 때는 저희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모르잖아? 그런 때 내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그 애를 붙잡아야 하는 거야. 온종일 그 일만 하면 돼. 이를테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야.”

터널은 또 올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함께라면 두렵지 않습니다. 사랑받는 하느님의 딸, ‘참된 얼굴’이란 뜻의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주었듯이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우울증에 운동이 가장 중요하다고 해서 거의 매일 천변을 걷습니다. 한 아이가 엄마, 아빠와 함께 숨넘어갈 듯 까르르 웃어댑니다. 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박현경 베로니카()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3-02-28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11. 28

시편 38장 10절
주님, 당신 앞에 저의 소원 펼쳐져 있고 저의 탄식 당신께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