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거울 안에 서 있는 저를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왜곡이 심한 플라스틱 거울이라고는 하나 그 안에는 분명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얼굴에 묻힌 불혹의 남자가 서 있습니다.
저의 모습임이 분명하지만 꽤나 낯설고도 어색한 모습.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흔히들 자신의 나이를 착각하거나 잊어버리곤 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사회와는 달리 매일이 거의 같은 일상 속에서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지 못하는 까닭도 있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비상의 날개가 꺾인 이곳에서의 시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기도 한 것입니다. 저 역시 가끔씩 저의 나이를 떠올릴 때면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저는 여전히 젊기만 한 모습이니까요. 하루하루의 비슷한 날들이 모여 한 달 두 달이 되고 다시 한 해 두 해가 되어 이루어진 기나긴 세월이 저를 젊은 남자의 모습에서 이렇듯 중년의 남자로 변화시켰나 봅니다.
가끔은 덧없는 인생이 허무해 보이고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먹은 지리멸렬한 저의 인생이 서글퍼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는 있었지만 혼돈스럽기만 했던 지난날들이 그립지 않고 초라할 수도 있을 지금의 모습에 오히려 평안과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딱히 언제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조금씩 저의 외모를 변화시킨 세월이 제 마음도 조금씩 변화시켰나 봅니다. 수년을 이곳 교도소 담 안에서 살았기에 기실 뚜렷한 미래에 대한 보장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한순간도 만족을 느끼지 못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의 현실에서는 감사와 작은 행복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 이제는 저의 중심이라고 당당히 고백할 수 있는 주님 안에서 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충남 대전의 한 빈농의 2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집들이 그러했듯이 저희 집도 그리 넉넉한 형편은 되지 못하였지만 끼니 걱정은 심하게 하지 않았던 평범한 가정이었다고 기억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버님께서 도박에 빠져들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던 농지와 집까지 날리고 빚까지 지게 되어 소위 말하는 야반도주까지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새로이 옮긴 충주에서 외삼촌께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계셨기에 옷가지만 겨우 싸들고 도망쳐온 우리 가족은 외삼촌의 농사일을 도우며 살게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해야 했던 농사일은 매우 고되고 힘들었기에 재미를 붙일 수 없었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이런 가난한 생활에 염증을 느 껴 19살의 어린 나이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넓고 넓은 서울이었지만 배운 기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회경험도 전혀 없었기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마장동에 있는 고깃집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힘든 서울 생활을 하며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고기에 대하여 공부하며 늦게 퇴근한 결과 절 예쁘게 봐주신 사장님 소개로 아내도 맞이하게 되었으며 제 가게도 갖게 되었습니다. 10여 년을 간절하게 일하였더니 어느덧 5개 지점의 사장님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무렵 아내는 어머님의 권유로 성당에 나간 것이 계기가 되어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내는 번창하는 사업과 풍요로운 생활 모두 하느님의 축복이니 휴일에 성당에 나가 하느님께 기도하자며 매번 권유했습니다. 저는 약속을 미루고 미루다 어쩔 수 없이 성당에 나가면 불평만 하며 전혀 믿음 없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때에 저는 속된 말로 “하느님이 밥 먹여주나 내가 열심히 일해야 잘 먹고 잘살지”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 사고를 지니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던 중 어느 날 건강했던 아내가 전에 없던 심한 하혈을 쏟아내며 참을 수 없는 고통을 호소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저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아내를 데리고 큰 병원에서 내과의로 근무하는 친구를 찾아가 진료를 받았습니다. 아내를 진료한 친구는 정밀검사를 해야 확실한 결과가 나온다며 대장 쪽에 염증이 생긴 것 같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아내를 데리고 정밀검사를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고 조직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혹시 암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어 믿음조차 전혀 없었던 저였지만 하느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혹시나 하는 나쁜 생각이 나의 기우이길 간절히 바라며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아내는 소중하겠지만, 저의 아내는 황량한 사막 같은 인생에 기적처럼 나타난 오아시스 같은 존재로 절 살게 하였으며 무엇보다 소중한 제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아내의 건강은 그만큼이나 절실하였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갖은 고난과 시련을 함께 굳건히 지켜온 그녀였기에 불행이 생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며칠 뒤 친구의 부름에 저 혼자 병원을 찾았고 검사결과가 나온 듯 친구는 X-RAY 사진을 걸어 놓고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무심한 놈아, 아내가 이 지경 되도록 넌 도대체 무엇했냐?”며 사진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물혹을 가리키며 암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수술하면 아직 희망은 있다고 했으나 그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눈앞이 캄캄했으며 어떤 말도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내가 암이라니 그것도 사망률이 90도 넘는 대장암에 걸린 것도 몰랐다니, 저는 심한 자책감과 절망감에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다 친구의 위로와 희망적인 말에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일어나 병원을 나왔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아내의 불행에 대해 나도 모르게 회한의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지금껏 누굴 위해 이렇게 악착스럽게 살았으며 무엇 때문에 남의 손가락질까지 받으며 간절하게 살아왔는지 모든 것이 덧없고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지금껏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내 인생 여정에서 그 순간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삶은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소유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것에 더욱 큰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필이면 그걸 남의 얘기로만 알았던 안 좋은 일이 제게 일어난 지금 깨달은 것입니다. 누구보다 착하고 신앙심 깊은 아내에게 하느님은 왜 그리도 가혹한 고통을 주시는지 알 길이 없었으며 원망스러웠습니다. 저에게 당면한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두려움에 앞서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용기를 내야 했습니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선 가족 모두 힘을 모아야 한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아내와 어머님께 모든 사실을 알렸습니다. 수술하면 아직 희망이 있다는 사실과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웠습니다. 어머님께서는 하나뿐인 며느리가 암이라는 사실을 듣자 눈시울이 젖으셨으며 슬픔을 애써 감추던 아내가 눈물을 흘리자 아내를 꼭 껴안아주시며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며칠 뒤 아내는 정든 집을 떠나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아내는 떠나갈 때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였는지 못내 아끼던 물건들을 매만지며 눈물지었습니다. 아내의 그 모습이 가슴에 비수가 되어 칼로 베이는 아픔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저 아내를 안아주며 위로의 말 밖에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얼마 후 방사능 치료와 약물치료가 병행되면서 아내는 암과의 사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어머님과 저의 보살핌으로 아내는 삶의 의지를 굳건히 지켜나갔지만, 시간이 흐르자 점차 약해지는 육신에 삶의 의지 또한 약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치료 부작용으로 머리카락은 손만 대면 빠져 버렸고 몸은 쇠약해져 보기에도 너무나 안쓰러워 어머님과 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이런 아내를 위로하면 아내는 오히려 자신보다 어머님과 저를 더 걱정하여 더 측은하게 느껴졌습니다. 애써 웃으며 자신은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남몰래 홀로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숨은 몸짓을 하는 아내를 지켜보는 어머님과 저는 더욱더 슬펐으며 아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무능함이 너무나 원망스러웠습니다.
며칠 후면 수술날짜가 다가오기에 저는 어떻게 하든 아내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생각 끝에 어렵게 아내가 다니는 성당 신부님을 찾아갔고 저는 아내의 사정을 얘기하고 용기를 주었으면 하는 부탁을 드렸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아내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며 수술 때까지 매일 방문하여 아내에게 힘과 용기를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다음날, 신부님과 수녀님의 병문안으로 아내는 무척 기뻐하며 용기를 얻었고 우리는 함께 하느님께 아내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 중 제 눈물을 보신 신부님은 손을 잡아주시며 하느님께서 시련을 주시는 것은 틀림없이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니 절대 믿음을 버리지 말고 굳건히 기도하라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말씀에 믿음을 갖고 병실을 오가며 성당에 나가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때론 신부님을 따라 기도하면서 저도 모르게 참회의 눈물이 흘러내리기도 하였습니다.
간절한 기도 때문인지 최악의 상태였던 아내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건강도 점차 좋아졌습니다. 항문까지 전이된 암으로 옆구리에 구멍을 뚫고 인공 호스를 통해 용변을 배출해야 한다는 어려움과 앞으로 몇 년을 더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의사의 우려가 있었지만 새 생명을 얻었다는 기쁨에 하느님의 은총이라며 매일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내는 비록 시한부의 삶일지라도 덤으로 얻은 생명이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하느님께 의지해 봉사와 사랑을 실천하며 살겠다며 제게 함께 하자고 하였습니다.
이후 아내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서 봉사단체에 가입해 무의탁 노인과 소년ㆍ소녀 가장 돕기 등 불우한 환경에 처한 이들에게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저는 이런 아내의 모습을 보고 “몸을 생각해서라도 무리한 일은 하지 말라”고 말하였더니 아내는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 짊어지시고 못 박혀 돌아가신 것에 비하면 부끄러울 뿐”이라며 “어려운 사람을 돕는 건 자신의 사명이며 남은 생의 의미”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도 아내와 같이 ‘남을 위해 저렇게 헌신적으로 봉사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저의 속된 타성으로 아내처럼 남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한다는 것은 결코 실현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듯 아내는 예전의 건강을 되찾아갔으며 모든 것들은 제 자리를 찾아가는 듯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이듬해 무리하게 확장했던 사업에 자금문제가 하나둘씩 생기더니 설상가상으로 동업자였던 친구의 사기로 저의 모든 사업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지금껏 피와 땀으로 세워놓은 사업이었는데 동업자의 사기로 도산하게 되자 너무나도 분한 마음에 동업자였던 친구를 원망하여 찾아갔지만, 친구는 이미 모든 짐을 제게 지운 채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믿었던 친구에게 당한 배신감으로 절망과 실의 속에 매일을 술로 지새우게 되었습니다. 피땀 흘려 이룬 사업체와 집은 손 쓸 틈 없이 은행에 넘어가 버렸고 졸지에 우리 가족은 갈 곳 없는 풍전등화의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고 이제는 가정까지도 돌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저는 모든 원인인 친구에게 더욱 분노하게 되었고 어떻게 해서든 잃었던 돈을 되찾아보겠다는 생각에 친구를 찾아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미 부도를 내고 사라진 친구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저의 분노와 원망은 식을 줄 몰랐고 여러 날을 수소문한 결과 부산 어딘가에 술 가게를 열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길로 바로 친구를 찾아 나섰습니다만 가게엔 친구가 없었고 저는 분한 마음에 술이 만취된 상태에서 친구의 행방을 물으며 행패를 부렸습니다. 한동안 행패를 부린 후 쫓기다시피 쫓겨나온 가게 앞에서 그 친구를 마주치게 되었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일어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실감하기까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이미 후회는 늦어버렸고 모든 것은 과거가 되어 버린 후였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며 시한부의 삶을 살아가는 아내를 힘들게 한 미안한 마음이 나의 가슴에 메여 있었기에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이렇게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 한순간의 어리석음에 내 인생은 지울 수 없는 낙오자가 되어 버렸고 나만을 믿고 살아온 아내와 어머님에게 더욱더 무거운 짐을 지게 하였으며 가슴속 깊숙이 크나큰 상처를 내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시한부의 삶을 유지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어머님의 소망은 뒤로한 채 영어의 몸으로 세월의 무게를 져야 했던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회한의 눈물만 남지만 처음 이곳 생활은 가족 걱정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보금자리에서까지 쫓겨나 갈 곳 없는 어머님과 몸이 불편한 아내가 나 없이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 왔습니다.
견딜 수 없는 근심으로 영어의 몸인 저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몸짓인 소망을 담아 하느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지난날 나의 기도로 아내에게 새 생명을 주신 하느님을 떠올리며 성령의 힘으로써 다시 한 번 닥친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눈물로써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간절한 저의 기도는 매일 계속되었고 하느님은 저의 기도에 감응하셨는지 며칠 뒤 아내는 수녀님과 찾아와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선행 깊은 아내의 처지를 안 본당 자매님들이 서로 돕기를 자처하여 기거할 방과 살아가게끔 도와주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수녀님께서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이니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고 주님을 의지하며 따르라는 말씀을 하신 후 이런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부님께 “신부님 저는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으며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여 늘 좌절과 고통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떡하면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라고 고해성사를 하였답니다.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용기를 내십시오. 형제여,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을 만들고 계시는 중이니 하느님을 굳게 믿고 기도 열심히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아울러 신부님께서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이며 이 시련도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니 믿음을 굳건히 하여 더욱 주님을 의지하며 따르라는 말씀을 하셨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성시킨 채 세상에 보내지 않았으니 한순간의 실수로 좌절하지 말고 주님의 가르침으로 시련을 극복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고통과 아픔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 의지해 모든 시련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인간의 삶은 미완성이기에 때론 삶에서 묻어나는 실수로 고난과 시련을 겪기도 하지만 그 시련은 의지를 강하게 만들고 하느님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흙으로 만든 그릇도 불 속에 구워야 단단하고 아름다운 빛깔을 지니듯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시련의 불로써 참된 사람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상록수가 푸르다는 것은 겨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어쩌면 나약한 인간은 하느님이 주신 시련을 통해 자기완성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련 속의 고통과 슬픔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뒤에 오는 인내와 희망, 그리고 강한 의지와 삶의 지혜임을, 이것은 모두 하느님의 선물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뒤늦게나마 체험을 통해 시련조차 하느님의 선물이자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으며 실천과 사랑을 통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99마리의 양보다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더 사랑하신다는 주님께서는 이처럼 놀라운 체험을 통해 저를 당신 품으로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이 있은 후에도 미적거렸던 저는 이곳에서 만난 미카엘 형제와의 인연으로 결국에는 빛이신 주님을 향해 저의 작은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곳 교도소 안의 신앙은 온실 신앙이라고 부를 정도로 보통의 신자들이 흔히 신앙과 생활에서 일치하지 못하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반면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가며 결코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남을 위하여 애쓰는 등 정말 진실된 자세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던 미카엘 형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미적거렸던 못난 죄인을 깨우치려 베푸신 주님의 은총 덕분이었는지 새로이 전방간 곳에서 그 형제분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그 형제분과 아내의 강력한 권유로 예비자 교리반에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진심을 다해 접하는 미사 과정과 교리는 복잡하고 이해하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으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은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9) 라는 말씀을 들은 저는 모르는 것을 많은 분에게 물어보며 배우고자 하였고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 수도 없이 질문하였습니다. 그러자 감사하게도 하느님께서는 제게 그 답을 조금씩 보여주셨습니다. 먼 길을 돌아 뒤늦게 찾아왔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요한 6,37) 라는 말씀처럼 그런 저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제 물음에 답을 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수개월이 흐른 후 저는 수녀님과 자매님들을 비롯하여 여러 형제님의 관심과 기도 덕분에 2018년 겨울 실로 아주 먼 길을 돌아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받으며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신영세자들 모임인 카리타스 시간 중 저는 자매님과 신학교 학사님들과의 대화를 통해 태어나서 그동안 한 번도 진실 되게 생각해보지 못했던 인생, 사랑, 행복, 희망, 죄, 회개 등 여러 문제들을 심도 있게 고민해 볼 수 있었으며 나눔회 시간 등을 통해서 성서공부도 하게 되었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마음속에 찾아드는 평화를 느꼈으며 당시에는 비록 느끼지 못하였지만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공상과 망상으로만 메워졌던 시간들이 성서 일기와 묵상 그리고 묵주기도의 시간으로 차츰차츰 바뀌어 갔습니다. 이곳에 온 후로 저의 마음은 사막처럼 메마르고 황폐한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루기도 중에 까닭 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으며 그때서야 지난날의 믿음 없던 저의 모습이 진정으로 후회스럽고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또한 저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게 되었으며 피해자를 위해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미움과 원망 모두 주님께 봉헌하며 어렸을 적 불우했던 환경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부모님과 이곳에 들어온 후 어느 날 연락이 끊긴 아내, 그리고 제게 아픔을 주었던 사람들을 이해하며 용서하였습니다. 이전까지의 전 스스로 한 잘못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오직 타인만을 미워하며 탓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님께서 편찮으신 몸을 이끌고 수녀님과 함께 면회를 오셨고 아내가 2년 전에 하느님의 곁으로 갔다는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어머님과 수녀님은 2년이란 시간 동안 이곳에 있는 저에게는 아내의 부탁으로 일부러 내색조차 않으셨던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남긴 일기장과 편지를 읽는 내내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아내 가슴에 대못을 받고 용서도 구하지 못한 채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처량한 제 처지가 너무도 서러워, 또 아내에 대한 그리움에 목 놓아 울었습니다.
하지만 제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던 미움과 원망을 모두 풀었기에 그나마 아내의 소식을 알게 된 것임을 깨닫고는 아내 영혼의 안식을 위해 주님께 기도 올렸습니다. 그리고 제 잘못으로 인한 모든 일들을 용서해 주십사하고 간절히 묵주기도를 통해 성모님께 매달렸습니다. 여름과 겨울 두 계절만 존재한다는 담 안이지만 사계절은 어김없이 찾아들었고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 수용생활 한지도 벌써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기에 이 시간 동안 이 못난 죄인 또한 나이를 먹으며 상처도 조금씩 아물어 갔으며 조금씩 신실해졌습니다.
지금의 모습도 물론이거니와 믿음이 없던 과거의 모습을 이렇게 꺼내어 놓기가 정말 많이 망설여질 만큼 못나고 부끄러운 저이지만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는 주님께서는 그런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시어 지금은 담 안 공동체인 여주교도소 엠마우스 공소네에서 독서 일을 맡아 하느님께 헌신하며 믿음의 아들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또한 레지오 쁘레시디움 ‘평화의 모후’의 단원이 되어 남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사는 삶과 성모님께 대한 순명하는 자세를 조금씩 배워나가며 하느님의 영광과 성모님의 사랑을 위해 봉사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턱없이 부족한 저이지만 저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해준 아내와 미카엘 형제님을 닮아 누군가 제게서 미약하나마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도록 날마다 노력하고 있으며 이제는 제 생명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희생과 보무의 삶을 살고자 다짐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온갖 방황 끝에 이제는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죄인임을 고백하며 당신의 자녀임을 깨닫고 느끼는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너무도 커다란 죄를 짓고 결코 지울 수 없는 과거를 가졌기에 제가 누리는 이 마음의 평화가 너무나 과분하게 느껴지고 때로는 송구스러울 리만큼 자격지심까지 듭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주님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믿고 주님 안에서 조금 더 곧은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지난날의 과오를 조금이라도 갚는 길이라고 생각하기에 오늘도 감히 담 안 수도자가 되길 희망해 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이곳, 행정구역으로 여주시 가남읍 여주교도소. 흔히들 이곳을 학교, 빵, 큰집 등 부정적인 의미로 표현하지만, 주님 안에서 새 삶과 영원한 생명의 길을 발견한 저와 동료 교우들은 여주교도소 엠마우스 공소네 담 안 수사로 불립니다. 감히 수도자를 자칭하는 송구하기 짝이 없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것은 사회의 은인들과 고마우신 분들이 상처 입은 수용자들에게 갇혀 생활하는 그 기간 동안 보속과 수도하는 마음으로 잘 생활한다는 뜻으로 불리어지는 것이 다름 아닐 것입니다. 이제 언젠가 될지는 모르지만 먼 훗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정말 아름답고 좋은 모습의 향기 있는 삶을 살리라 다짐해봅니다. 묵주 한 알 한 알마다 온 마음을 다하여 정성으로 수놓아 성모님께 봉헌한다면 성모님께서는 주님께 전구해 주시리라 믿으며 오늘도 주님 닮은 수사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10,13)
위의 말씀처럼 이 글을 통하여 삶의 실의에 빠진 많은 형제님들이 새 삶을 찾으시기를 기원하며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민경근 아우구스티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