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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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공인 이전 신앙 선조들은 주택에서 성찬례 거행

[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11. 주택에서 시작한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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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다락방. 출처=RadoJavor

대체로 이렇게 알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받아 자유로이 모이기도 어려워서 이렇다 할 성당이 없었다. 그러다가 313년 그리스도교가 공인받고 나서 비로소 로마인들의 공공장소인 바실리카를 이용해 성당을 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무 준비도 없다가 바실리카라는 큰 공간을 이용하여 만든 성당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는 것인데, 과연 그럴까? 이 질문을 시작으로 몇 회는 초기 그리스도교 성당을 향해 걸어간 신앙의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교회, 건물이 아니라 모임 뜻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파하러 나선 곳은 주로 큰 도시였다. 그러나 100년쯤에는 이스라엘의 동쪽 지역으로 넘어가 그곳의 작은 도시나 마을에까지 퍼져나갔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 모일 장소를 특별히 따로 만들 생각도 없었고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모일 집을 지을 만한 조직도 없었고, 더욱이 이교의 신전과 같은 건물을 세울 만한 재력도 전혀 없었다. 그들에게 당장 시급한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과 부활하심을 널리 증언하는 것이었다.

‘에클레시아’라는 말이 뜻하듯이 ‘교회’는 ‘모임’(會)이었지 건물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산이나 들 또는 회당에서 가르치셨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적절하다고 여기면 어디에서나 만났다. 복음을 전하여 개종자를 얻기 위해서라면 길모퉁이에서도 만났고 예루살렘 성전 구역이나 회당에도 모였다. 아마도 드물었겠지만, 공공의 넓은 방도 빌렸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 자주 누군가의 집에서 제자들, 병든 자, 바리사이들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셨던 곳이며, 부활하신 후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으로 모였던 장소는 예루살렘에 있던 어떤 집의 “자기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이었다. 이 다락방을 “체나클(Cenacle)”이라고 하는데, 식당이라는 말이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했을 때도 “백스무 명가량”이 다락방에 모여 있었다(사도 1,13-15)고 할 정도로 큰 방이었다. 이 집은 당시 로마 제국에서 하급 또는 중산층의 공동주택인 인술라(insula)였고, 그 한 층의 평균 면적이 93㎡였으므로, 이 큰 방에 120명이 꽉 차도록 모일 수 있었을 것이다.

주님의 제자들이 세상을 떠나자 전교 모임은 중지되었다. 기존 신자와 새 신자 사이 증언에 차이도 크게 벌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모여야 했다. 그것도 정기적으로 모여야 했다. 신약성경은 여러 집을 옮기며 “빵을 떼며” 성찬례를 거행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사도 2,46)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장소를 바꾸었다는 것은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수도 일정했다는 말이다.

 
‘최후의 만찬’. Jacopo Tintoretto, 1594. 출처=Wiki Commons

초대 그리스도인, 주택 식당에서 성만찬

제자들이 활동했던 시대 이후인 50~150년에는 함께 빵을 나누는 것은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고, 친교(코이노니아)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통상적으로 모이는 장소는 주택의 식당이었다. 그들은 빵, 포도주, 물고기를 가지고 와 평화의 입맞춤을 나누고 그리스ㆍ로마인들의 방식에 따라 보통 먼저 식사하고 그다음에 미사를 거행한 것 같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만찬을 먹으려고 모일 때는 서로 기다려 주십시오”(1코린 11,33)라고 말한 것으로 보면,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너무 빨리 먹어서 늦게 온 사람에게는 음식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만큼 그리스도인들의 예배가 아직은 비형식적이고 유연했다는 뜻이다. 예배의 핵심은 성만찬이었으므로 식사를 마친 다음 식당에서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기억하며 빵과 포도주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1세기 말이나 2세기 초에는 신자 수가 늘어나고 식사에서 오는 여러 가지 폐단이 있어 공동식사는 점차 성체성사로 바뀌었고, 예배는 점차 정식화되어 갔다. 그러면서 주택의 식당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신자들은 대체로 하류층 또는 중산층이었으므로 전형적으로 싼 주택에 모였는데, 이런 주택은 다른 이들의 눈에 잘 안 띈다는 점에서 유리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 여러 편의와 식사로 지속해서 제공하여 친교하고 성만찬을 할 수 있는 장소로는 부유한 이들의 주택이 훨씬 적절했다. 이들의 주택을 1~2세기 로마 제국에서는 ‘도무스’라 불렀다. 길에 면해서는 상점이 있고 입구로 들어가면 사적인 영역이 아트리움이라는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안마당에 있는 물을 담는 큰 그릇으로 세례를 줄 수 있었다.

로마 사람들의 주택에서 가장 큰 방은 식당이었다. 낮은 정사각형 식탁을 둘러싸고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대어 식사를 할 수 있는 긴 의자 세 개가 ㄷ자로 배열되는데, 식탁에는 이런 의자가 세 개 있는 방이라 하여 식당을 ‘트리클리니움(triclinium)’이라 불렀다.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의자는 입구 반대편에 놓였고 연장자 등 귀빈이 그 자리에 앉았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비스듬히 기대어 앉으셨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예수님께서 그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찾아왔다는 것을 보면(루카 7,36-37), 이런 주택의 식당은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을 정도로 반개방적이었던 것 같다.

사도행전 20장은 트로아스의 어떤 집에서 성찬례를 거행하려고 모였는데, 바오로가 자정까지 설교하는 동안 에우티코스라는 젊은이가 삼층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잠에 취하여 그만 밑으로 떨어져 죽었는데, 그를 다시 살리고는 다시 빵을 떼어 나누며 식사를 했다고 말한다. 삼층이라 했으므로 이 집은 3~4층 높이의 한 가족의 건물인 인술라라는 공동주택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주택의 제일 위에는 유일한 큰 방인 식당이 있었고 종종 테라스로 열려 있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아나가이온(anagaion) 또는 히페론(Hyper?on)이라고 자주 언급되는 최상층이다. 위층 방에는 등불이 많이 켜져 있었고, 창문에 걸터앉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으며, 자정에 이 일이 있은 다음에도 날이 샐 때까지 설교는 계속되었다 하니, 그럴 정도로 회합은 비공식적이었으며 과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애찬(Agape feast), 성 마르셀리누스와 성 베드로 카타콤. 출처=St Elisabeth Convent
‘주택 교회’ 정신 어떻게 되살릴까

그리스와 로마 전통에 따라 국가 종교만이 사원을 세웠던 시대에, 그리스도교의 건축은 200년이 돼서도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었다. 단지 이 구원의 종교는 특별한 예배 형식과 이를 위해 모인 신자들의 경제적 여력에 따라 눈에 띄지 않는 하위층의 주택에서 시작하다가, 점차 여유 있는 이들에게서 빌리거나 기부받은 주택에서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이처럼 한 가족이 일상생활을 하던 주택이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정기적인 회합으로도 쓰이던 주택을 ‘주택 교회(house church)’라고 한다. 50년에서 150년까지는 주택을 그대로 교회로 사용했기 때문에 고고학적인 증거는 매우 부족하지만, 북아프리카에서는 4세기 초까지도 나타날 정도로 두루 쓰였다. 이처럼 교회의 출발은 주택이었고 당연히 전례도 주택에서 출발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성당에서 ‘주택 교회’의 정신은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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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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