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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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Ⅱ] 갈릴레오 재판 사건 (5)갈릴레오의 천문학적 발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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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그 자체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과 비교해서 더 정확한 천문학적 모델이라 말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톨릭교회 안에서 사제이면서 동시에 수학자, 천문학자로서 활동했던 여러 저명한 인물들, 특히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그레고리오력을 만든 장본인인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Christopher Clavius·1538?~1612)의 경우에는 당시 교회의 입장을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지지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이 천동설보다 우주를 더 정확하게 기술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여러 중요한 관측들로부터 얻어낸 증거들을 통해 (가상원과 주전원 등을 생략한 더욱 단순한 형태의) 지동설을 강력히 지지한 인물이었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이탈리아 토스카니 지방 피사에서 태어난 인물입니다. 그리고 1642년 본인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갈릴레오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물리학의 아버지’, 혹은 ‘첫 번째 물리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통해 참으로 많은 물리학적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관성(inertia) 개념 정립 및 속도와 가속도 개념 정의를 통한 운동학(kinematics) 확립, 두 관성 좌표계에서의 상대성원리(Galilean principle of relativity) 정립, 진자(pendulum) 운동 분석, 음파의 주파수 분석 등이 있습니다.

또한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뒤를 잇는 탁월한 천문학자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물리학 연구에 집중하던 갈릴레오가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적극 지지하는 천문학자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그가 1609년 ‘자체적인 고성능 망원경을 제작’한 것에 있었습니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처음으로 발명하지는 않았지만, 망원경이 발명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더 뛰어난 자신만의 망원경을 제작해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1608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망원경은 겨우 3배 더 확대될 뿐이었지만, 1609년에 완성된 갈릴레오의 망원경은 배율이 무려 20배였기 때문에, 그는 그것으로 밤하늘을 관측함으로써 놀라운 여러 결과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갈릴레오는 자신의 고성능 망원경을 활용함으로써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의 분화구 측정, 목성의 가장 큰 네 개 위성들의 발견, 태양 흑점의 관측과 분석, 금성의 위상(겉보기 모양) 변화 관측, 다양한 별들의 관측 등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히 목성의 네 위성들을 역사상 최초로 발견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중적 공전 운동’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역사상 최초로 관측을 통해서 밝혔기 때문입니다. 갈릴레오는 목성 주위를 4개의 위성이 공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관측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림1은 목성의 네 위성을 발견한 후 갈릴레오가 직접 그린 그림입니다.) 기존의 천동설에 따르면 지구를 중심으로 해서 모든 것들이 다 지구 주변을 돌기 때문에 딱히 위성(satellite)이라는 개념이 도입될 여지가 없었습니다. 달도 행성이고 태양도 행성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코페르니쿠스가 갑자기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꿔버린 모델을 제시하니까 갑자기 위성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도입되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따르려고 보니까 달이 행성인 지구 주변을 공전해야만 천문 관측 데이터를 설명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태양 주위를 행성인 지구가 공전하고, 지구 주위를 위성인 달이 공전하는 식의 이중적 공전 운동이라는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운동이 도입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그냥 천동설을 받아들이면 될 것을 왜 굳이 달의 이중적 공전 운동이라는 새로운 개념까지 도입하면서까지 지동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납득을 하기 힘들어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바로 갈릴레오가 목성의 네 위성들이 목성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 것을 관측함으로 인해서 이중적 공전 운동이라는 것이 실제로 우주 안에 존재한다는 걸 입증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달도 지구 주변을 공전할 수 있을 가능성을 높여주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갈릴레오는 이 발견 이후로 지동설이 옳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금성의 위상(겉보기 모양) 변화를 관측하는 데 갈릴레오가 성공을 합니다. (그림2 역시 갈릴레오가 금성의 위상 변화 관측을 한 후 직접 그린 그림입니다.) 금성도 달이 그러하듯이 위상이 변화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상 변화는 바로 태양이 중심에 있고 금성이 태양 주변을 공전하고 지구가 그 바깥의 더 큰 궤도를 공전하면 바로 금성의 위상 변화가 쉽게 설명이 됩니다. 기존의 천동설로는 금성의 위상 변화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갈릴레오는 금성의 위상 변화 관측 이후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옳은 것 같다고 생각하게 만든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갈릴레오는 이와 같은 관측 결과들을 1610년에 출판된 「별의 전령」(Sidereus Nuncius)과 1613년에 출판된 「흑점에 관한 편지들」(Istoria e dimostrazione intorno alle macchie solari)에 실어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이 두 권의 책으로 탁월한 관측 천문학자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책들은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냈고, 그럼으로써 가톨릭교회 내에서 지동설이 공론화되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에서 분명히 강조해야 할 점은, 갈릴레오의 이 모든 천문학적 관측 결과들이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는 지동설을 ‘직접적으로 확증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이 모든 관측 결과들은 갈릴레오에게 지동설이 좀 더 나은 모델이 아닐까 하는 심증을 더 굳히게 만드는 몇 가지 ‘간접적인 증거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당시에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아직은 ‘가설’ 수준이었던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어쨌든 갈릴레오의 천문학적 업적들은 1610년대 가톨릭교회 안팎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갈릴레오의 학문적인 승승장구는 곧이어 발생하는 불행한 사건으로 이어지게 되고 맙니다. 그것이 이제부터 다루고자 하는 ‘갈릴레오 사건’인 것입니다.



김도현 바오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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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3-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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