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는 살림집인 주택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신자들은 계속 늘고 있었다. 250년까지 소아시아는 60가 그리스도인이었다. 로마에는 신자가 3만에서 5만 정도가 되었고, 북아프리카에는 작은 마을 규모의 신자들이 수백 개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주택의 식당이나 안마당만으로는 이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점점 더 큰 공간이 필요해진 것이다. 일단 그들은 주택을 고쳐 이를 해결했다. 이것이 지난 회차에서 말한 ‘주택 교회’와는 다른 ‘교회의 집’이다.
초기 교회는 가난한 이들도 초대하여 서로 음식을 나누었으며 이어서 성찬 전례를 거행했다. 그러나 신자가 늘어나고 더 큰 공간이 요구될수록 공동식사는 점점 어려워졌다. 또한 2세기에는 식사를 나누기보다 빵과 포도주로 현존하시는 주님을 모시기를 더욱 원했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신자가 충실하게 예배드릴 수 있도록 공동식사와 성찬 전례는 분리되면서 성체성사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2세기 중엽에는 부유한 신자가 기증한 주택을 개조하거나 확장한 예배만을 위한 새로운 성당의 공간이 나타났다. 이것이 ‘도무스 에클레시에’(domus ecclesiae) 곧 ‘교회의 집’(house of the church), 더 풀어쓰면 ‘하느님 백성의 집’이다. 이때 고대 로마에서는 ‘도무스’란 부유한 자유민의 대가족 단독주택을 말한다. 이것은 이전의 ‘주택 교회’와는 구분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차지하는 인구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영향력도 커졌다. 2세기 후반과 3세기 전반 사이에는 첫 번째 위대한 교부들이 나타났다. 서서히 교회의 지도자들이 나타났고 교회는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먼저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교회 지도자로 나섰고, 로마에서는 자유인과 부유한 은행가들이 집사 일을 맡았다.
217년과 222년 사이에는 주교의 사무실도 생겼다. 교회는 조직을 정비하면서 예배만이 아니라 자선, 묘지 관리, 재산관리, 개종자 교육을 포함한 활동도 넓혀 갔다. 사제품을 받은 성직자들이 나타났고, 로마를 비롯하여 제국 전역에 교구 조직이 퍼졌으며 주교가 각 도시의 신자들을 주관했다. 230년에는 신자 중에 고급 관리와 조신이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읍 의회나 궁궐, 원로원, 재판소에도 들어가 있었다. 이렇게 보면 당시 그리스도교가 어려움 속에서도 영향력을 어떻게 키워 갔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교회의 집
그리스도인들은 이교의 신에게 제물과 기도를 바치기를 거절했고, 황제의 공적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250년과 257~260년에는 두 번의 피나는 박해를 받았다. 이때 그리스도인의 집회는 금지되었고 재산도 몰수되었다. 그럼에도 이 박해가 끝난 이후에는 반드시 구원되리라는 강한 믿음과 강한 조직으로 교회는 재산, 예배드리는 건물, 묘지, 회합의 권리 등을 회복했다.
250년까지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숨어 산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개종도 했고 예배를 드렸으며 세례도 주었고 죽은 이를 정성스럽게 묻어 주었다. 로마 제국의 관례에 따라 박해 전후의 그리스도 공동체는 이러한 목적을 위한 재산을 가질 수 있었다. 영적으로 필요한 것, 도시 안에는 신자들의 모임, 사회적인 행복, 공동체의 행정, 자선의 분배 그리고 죽은 자에 대한 의식을 위한 시설을 가질 수 있었다.
풍부하고 분명한 전례는 200년에 생겼다. 전례는 신자와 예비신자가 참여하고 독서, 강론, 공동 기도인 ‘예비 신자들의 미사’와, 세례를 받은 신자를 위한 ‘신자의 미사’ 등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집회실은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뉘어 떨어져 앉았다. 회중은 부제의 지도를 받았고 일정한 순서로 앉았다. 주교는 사제단에 둘러싸여 성찬례를 주례하였으며, 로마의 치안 판사처럼 제단의 의자에 앉았다. 제단에는 성체성사를 위한 식탁, 봉헌물을 위한 또 다른 식탁이 놓였고, 낮은 목제 난간은 제단을 에워싸면서 성직자와 평신도를 나누었다. 가구는 이동할 수 있는 간단한 목제 가구를 사용했을 것이다.
신자들도 차이를 두었다. 250년 무렵의 시리아 교회법은 어린이는 앞에, 그다음은 남자, 제일 뒤에는 여자를 배열했다고 한다. 로마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좌우로 나누어 앉았는데 이는 이후에 관습이 되었다. 예비신자는 첫 번째 전례가 끝나면 다른 곳으로 물러나 갔고, 두 번째 전례를 듣기만 하지 보지는 못했다. 고백자에게는 전실을 두었고, 견진성사를 받는 방이나 건물도 두었다. 이 여러 방은 모두 크기가 달랐지만, 세례, 견진 그리고 정기 모임을 할 수 있게 서로 연관성을 가졌다. 이런 요구에 따른 새로운 구조물을 ‘도무스 에클레시에’(domus ecclesiae) 또는 ‘오이코스 에클레시에’(oikos ekklesias)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의 집’, ‘하느님 백성의 집’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주택에 세워진 교회를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의 협력자들인 프리스카와 아퀼라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들의 집에 모이는 교회(the church at their house)에도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로마 16,3-5) “아퀼라와 프리스카가 자기들 집에 모이는 교회와 함께(together with the church at their house) 주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특별히 인사합니다.”(1코린 16,19) 이를테면 프리스카와 아퀼라의 가족이 사용하는 집에 교회가 모였다면 그것은 ‘주택 교회’가 되지만, 그의 집을 종교적 목적에 맞도록 고쳐 사용하였다면 그것은 ‘교회의 집’이 된다.
그리스도교 건축
이것은 로마에서는 티툴루스(titulus)라고 불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3세기 동안 그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부유한 신자의 개인 집을 ‘티툴리(tituli, titulus)의 복수’라 불렀다. ‘티툴리’란 주택의 문 앞에 놓이는 소유자의 이름이 새겨진 돌을 말한다. 이를테면 ‘티툴리 프리스카(Tituli Prisca)’라고 쓰면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프리스카의 집이라는 뜻이었다. 당시의 이들은 “교회에 간다”라는 말을 “~의 집에 간다”라고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티툴리는 로마의 원래 본당이었는데, 그 중 티툴루스 크리소고니(Titulus Chrysogoni)는 지금도 산 크리소고노(San Crisogono) 대성전이라는 이름의 본당으로, 발굴된 지하에는 4세기 성당으로 쓰였다고 추정되는 유적이 있다. 이 성당은 염수정 추기경을 명의 사제로 하는 명의 본당(titular church)이다.
이런 공동체 주택은 새로 지어졌을 수도 있지만, 실용적인 주택 건축의 전통에 따라 계획하는 데에는 제약이 많았다. 그러나 큰 도시의 평범한 주택들 사이에서 방해받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바람직했으므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중산층 주택의 벽 뒤에 숨은 예배의 공간을 얻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주택을 개조한 ‘교회의 집’은 로마 제국 전역의 작은 마을에서 마련해 갔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기 이전에도 이런 ‘교회의 집’은 계속 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그리스도교 건축은 가능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