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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교회의 등불이 되다 (2)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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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오래전 세상을 떠난 이의 삶을 말해준다. 밤하늘 수많은 별처럼 불을 밝히고 있는 달동네를 오르고, 집 없는 이들을 위한 청빈선언 대행진의 선두에 서있는 추기경. 빛바랜 사진 속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손을 잡고 있었다. 한국교회 최고 지도자였지만 권위를 상징하는 주교좌에서 내려와 가장 낮은 곳을 향했던 김수환 추기경. 그의 삶이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 깊이 남아있는 이유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위원장 구요비 주교)가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는 세 성직자 중 두 번째로 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함께한 김수환 추기경의 삶을 들여다 본다.


■ 가난한 신자들과 울고 웃었던 본당 신부 시절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너희는 이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거라”

장사꾼이 돼서 스물다섯 살 즈음 장가를 갈 생각이었던 어린 김수환에게 어머니의 말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13살,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신학교에 들어간 김수환 추기경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회의를 여러 번 느끼기도 하고 신학교를 떠나고 싶은 마음에 꾀병을 내어 한 학기 건너뛰기도 했다”고 과거를 회고했다. 그에게 깊은 사제성소를 심어준 것은 어머니였다.

옹기를 팔며 홀로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곧은 신앙심과 여장부 같은 기질이 대단했던 김 추기경의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무릎에서 신앙심을 키웠던 김 추기경은 자신을 이끈 하느님의 섭리를 기꺼이 따랐다. 1951년 9월 15일, 서품식 중 제단 앞바닥에 엎드린 김수환은 “주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의 첫 사목지는 안동본당(현 목성동본당)이었다. “전쟁 피해로 성한 집보다 불타 버린 집이 더 많았고 설상가상으로 두 해 연속 흉년이 들어 주민들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었다”고 김 추기경은 당시를 기억했다. 이제 갓 신부가 된 그의 관심은 주민들의 가난에 쏠렸다. 신자들을 위해 무슨 일이건 해야 했던 그 시간을 김 추기경은 “가난한 신자들과 울고 웃었던 본당 신부 시절이 성직생활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가난한 신자들과 보낸 ‘꿈처럼 아름다웠던 시간’은 훗날 김 추기경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를 사목표어로 삼고 세상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시작이 됐다.

독일에서 공부했던 시간은 세상의 일에 눈감지 않고 가난한 이들과 동행하는 성직자가 되는 토대가 됐다.

“한국교회가 성장하려면 신부들이 그리스도교 전통이 깊은 나라에 가서 하나라도 더 배워와야 한다”고 당시 대구교구장 서정길(요한) 대주교에게 유학을 가겠다고 요청한 김 추기경.

1956년 독일로 떠난 김 추기경은 뮌스터대학 교수 요셉 회프너 신부 밑에서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웠다. 요셉 회프너 신부를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고 회상한 그는 “신부님은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 등을 정립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며 “그런 이론적 토대가 허술했더라면 1970~1980년대의 그 험난한 시기를 제대로 헤쳐 나왔을까하는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또한 독일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맞이한 김 추기경은 독일 신부들과 공의회에 대해 토론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김 추기경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가톨릭교회가 쇄신을 통해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는 희망의 대역사였다”라면서 “공의회에 대해 나눈 많은 이야기들은 내가 신부로서 뿐만 아니라 훗날 주교와 추기경으로서 소임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 내 생각을 지배하는 가장 큰 주제는 인간입니다

1964년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 제12대 사장을 거쳐 1966년 초대 마산교구장을 지낸 김 추기경. 1968년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한 그는 1998년 퇴임까지 30년을 교구장으로 사목했다.

1966년 주교로 서품되고 대주교에서 추기경이 되기까지, 교회 안에서 그의 자리는 점점 위로 올라갔지만 그가 머문 자리는 늘 가장 낮은 곳이었다.

1968년 2월 9일 김 추기경을 주축으로 한국 주교단이 발표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는 한국교회의 첫 사회적 발언으로 의미가 크다.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해고되거나 협박을 받았던 강화도 심도직물 노동자들. 그들의 기본적인 인권과 권리가 짓밟히는 현장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김 추기경은 임시 주교회의를 개최하고 “인간 기본권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수호돼야 하기에 주교들은 부당한 조사 관계를 개선하는 데 적극 노력할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교회가 울타리를 넘어 바깥 세상에 눈을 돌려야 했던 이유를 김 추기경은 이렇게 설명했다. “내 생각을 지배하는 가장 큰 주제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다.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기에 그 권리와 존엄성은 언제 어디서든 지켜지고 보호받아야 했다. 이 같은 신념은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숨 가쁘게 헤쳐 나오는 동안 내게 절대적 판단 기준으로 작용했다.”

복음 정신에 비춰 정의롭지 않은 일들이 팽배했던 1970~1980년대, 김 추기경은 그런 상황들을 보고 침묵할 수 없었다. “교회가 왜 정치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느냐”라는 비판에 대해 그는 “교회는 하느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존재인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악과 불의에 저항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답했다.

이후로도 김 추기경은 한센인들, 외국인노동자, 성매매 여성들, 집을 잃은 철거민 등 우리 사회의 그늘에 가려진 이들 곁에 머물렀다.

1987년 4월에는 서울 상계동 판자촌에서 강제철거당한 주민들이 주교좌명동대성당 들머리에서 천막을 치고 생활하자, 당시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그는 2주 만에 교구장 자문기구로 ‘도시빈민사목위원회’(현 빈민사목위원회)를 설립했다.

오늘날 서울대교구 사회복지사목, 노동사목, 빈민사목의 토대를 만든 것은 김 추기경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엄혹한 시대였기에 빛과 같은 성직자가 나온 것일까. 김 추기경이 지금을 살았다면 어디에 가장 오래 머물렀을까. 그가 걸어온 길들은 그 답을 말해주고 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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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3-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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