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도로, 과거에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사고다발구역들이 있었다. 지형적으로 착시현상을 일으키거나 도로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 운전자가 사고를 일으키기 쉬운 곳을 말한다. 이러한 도로들을 발견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누군가가 사람들이 더욱 튼튼한 차를 타고 다니도록 인식개선 캠페인을 하거나, 사고지원금을 대폭 늘려서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도로를 개선해야 하는 문제이고, 우리는 더욱 안전하고 예방된 사회를 원하는 것이지 개개인이 더 강해져야만 살아남고 불의한 사고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사회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런데 자살문제 대해서는 유독 이런 시각이 있다. 길이 문제인데 개개인이 문제가 있다고 말이다. 누군가의 극단적 선택, 일가족의 비극을 두고 사람들은 너무나 안타까운 문제라고 하지만 그 문제를 사회적인 틀이 아닌 개인과 가정의 문제로만 보려고 한다.
한국이 자살률 1위의 국가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사망원인통계를 보면 느낌이 다르게 다가온다. 사망원인을 나이대로 보면 1~9세에서 원인의 2위가 타살, 10·20·30대 1위가 자살이다. 40·50대의 1위는 부동의 암이고 2위가 자살이다. 이러한 모습은 현재 우리 사회가 병들었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자살로 죽어간다면 이것을 모두 개인의 문제로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각자를 돌보고 치유하는 개인적인 회복을 말하지만 사회적인 회복을 말해야 할 때인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1코린 12,12)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공동체의 한 부분의 아픔이 모두의 아픔이 된다고 한다. 부부문제가 생길 때도 가장 먼저 살려야 할 것은 ‘하나라는 느낌’, ‘둘은 같은 배를 탔다’는 느낌이다. 그것을 살려낼 때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고 소중히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부부만이 아닌 공동체 안에서도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당 안에서는 주임신부와 보좌신부가 한배를 탔다는 느낌을 받고 있고 한쪽이 어려워지면 나도 어려워질 것이라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직자와 수도자가, 성직자와 신자들이, 나이든 신자들과 젊은 신자들이 얼마만큼 서로 같은 배에 탔다고 느끼고 있는지, 한쪽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그 공동체의 생명력은 결정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를 향한 용서이다. 용서는 과거의 의미를 변화시키고 예전의 고통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해준다. 용서란 단순히 잊어버리는 기억상실증이 아니다. 눈 앞에 있는 형제에게 무관심이란 무수한 상처를 입히고 죽음의 벼랑 앞에서 모른척했었음을 인정하고 마주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용서를 통해 개인의 상처를 회복하고 사회적 회복도 함께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차바우나 바오로 신부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자살예방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