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의 특성과 교육과 문화
사람의 특성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사람의 기질적 특성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일까. 사람은 교육과 문화라는 후천적인 요인들을 통해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 사람의 정서적·문화적 특성은 성장기에 형성되는 것일까. 사람의 문화적 감수성은 초·중·고 시절에 형성되는 것일까. 성인이 되고 나면 사람은 잘 변화되지 않는 것일까. 어떤 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 자신의 사유하는 틀과 방식, 다른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 어떤 것을 선택하고 수행하는 행동 방식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하늘 아래 명쾌한 대답은 없다. 사람의 특성은 내적 요인들과 외적 요소들에 의해 형성되어 갈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적 요인들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외적 요소들에 의해 더 깊은 영향을 받기도 할 것이다. 한 사람의 기질과 특성이 어떤 요인들에 의해 형성되고 발전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단지 추론해 볼 수 있고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나고 관계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그 사람이 살아가는 자리의 교육과 문화적 환경이 그 사람의 사유와 태도와 행동 방식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신앙과 신앙인의 모습
종교와 교파에 따라 신앙을 수행하는 방식과 신앙적 특성이 조금 다르다. 물론 같은 종교와 교파에 소속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성향과 기질과 특성에 따라 신앙을 고백하고 표현하고 실천하는 방식은 다르다. 신앙을 수행하는 방식의 특성을 일률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한국 사회에서 가톨릭신자와 프로테스탄트 신자의 신앙 수행 방식과 특성이 약간 구별되고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타율적이고 소극적이며 관습적인 신앙생활에 익숙하다. 반면에 개신교 신자들은 조금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듯하다. 성경 말씀을 강조하고, 고백적 믿음(신앙적 신념)을 중요시하고, 감정과 정서를 고양(高揚)하는 예배 형식이 개신교 특유의 신앙 모습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지나친 성경 문자주의가 초래하는 교조주의적 모습,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신앙 고백주의가 낳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이라는 개신교 신앙의 또 다른 이면이 있지만 말이다.
신앙 수행의 특성은 신앙인의 삶의 방식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정직하게 말하면, 성당과 예배당의 자리에서는 모르겠지만, 직장과 일상적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신앙적 신념을 고백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신자는 개신교 쪽에 더 많은 것 같다. 물론 가톨릭 안에도 선우경식 선생 같은 분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박해시대의 순교자들을 제외하면, 삶의 자리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하는 신자의 비율이 개신교가 더 높은 것 같다고 말하면 잘못된 판단일까. 가끔 우리끼리 하는 농담이 있다. 평균적 수준으로 측정하면, 가톨릭 성직자와 신자들의 모습이 더 괜찮아 보인다고 말이다. 극단적이고 배타적이며 편협한 모습을 보이는 많은 개신교 성직자들과 신자들에 비추어보면, 가톨릭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평균 수준이 조금 더 나은 것 같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삶의 모든 자리에서 신앙을 충실하게 고백하고 실천하는 신자의 숫자는 개신교가 더 많은 것 같다고 말이다.
단순화와 도식화의 위험은 있지만, 개신교 신앙 수행의 방식은 성경 공부, 동적인 예배, 일상에서의 신앙 고백적 태도로 규정될 수 있다. 천주교 신앙 수행 방식은 교리 공부, 정적인 전례, 교회법과 윤리 규범에 따른 관습적 태도로 규정되기도 한다. 개신교 신앙의 모습은 부정적으로는 교조적, 문자적, 배타적 성향을 보이지만 긍정적으로는 신념적, 헌신적 특성을 드러낸다. 천주교 신앙의 모습은 부정적으로는 형식적, 습관적 특성이 있지만 긍정적으로는 관용적, 포용적 성향을 나타낸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피상적이고 인상 비평에 근거한 것이지만 말이다.
■ 신자들의 신앙 교육과 문화
신앙의 모습과 특성은 주로 신앙 교육과 교회 문화 속에서 형성된다. 가톨릭신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신앙을 교육받고 어떤 교회 문화 속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벼려가는 것일까. 오늘날 본당의 신앙 교육 현실을 냉정하게 진단하면 그리 낙관적 전망을 가질 수 없다. 본당의 신앙 교육은 예비신자 교리 교육, 미사를 중심으로 하는 전례 생활, 본당 신심 행사 참여와 봉사 활동, 레지오마리애와 구역·반 모임 등 신심 단체 참여, 성경 공부 모임, 신자 재교육 차원에서 시행되는 특강들을 포함한다. 언뜻 보면 다양한 프로그램이 제공되는 것 같지만, 실제 현실에서 보면 신자 대다수는 미사 전례 참여가 전부인 경우가 많다. 물론 종교 생활에서 전례가 핵심이다. 전례 안에서 신앙의 형성과 교육이 다 이루어진다.
전례의 모습이 신앙의 모습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 가톨릭 전례 성사가 역동적이고 신자들의 자율적 참여가 보장되는 방식으로 작동되는 것일까. 가톨릭 신앙의 수동성과 피동적 특성이 혹시 전례의 모습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전례 교육만으로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전례 참여를 유발할 수 있을까. 전례 성사의 신학적 의미와 구원적 효과에 대한 의문이 아니다. 오늘의 전례가 신자들이 실제 현실에서 신앙을 살아가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절실하게 요청된다는 뜻이다.
전례뿐만 아니라 본당의 신앙 교육 역시 수동적이고 타율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강의 중심의 교육은 진정한 교육이 아니다. 강의는 공부 형식이라기보다는 소비 형식에 더 가깝다. 지식과 정보의 전달로서의 강의, 자극과 동기부여를 줄 수 있는 강의가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일방적 가르침과 전달 중심의 강의는 신앙의 자율성과 역동성을 키우지 못한다. 함께 참여하는 공부, 대화 중심의 교육 방식으로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신앙의 전수는 단순히 교리적 지식의 전달이 아니다. 신앙의 전수는 인격적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대화와 만남과 체험의 교육 방식이어야 한다.
신앙은 머리와 마음과 몸, 모든 영역에서 작동되어야 한다. 오늘의 가톨릭 신앙 교육은 자칫 교리적 지식과 규범만을 가르치고 몸의 형식적 참여만을 강조하는 데 그치는 경향이 있다. 참다운 신앙적 신념이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몸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신앙 교육은 신앙적 비전과 신념, 마음과 영혼의 열정, 몸의 의지적 실천을 끌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신앙은 신앙의 방식으로만 교육되고 전수될 수 있다. 신앙의 방식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 인격적 방식을 뜻한다. 위계적 문화 속에서 타율적 방식으로 수행되는 신앙 교육은 참다운 신앙을 형성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방식으로 교육”(토마스 그룸)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