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6월부터 이 지면에 기고해왔는데, 어느덧 마지막 글을 쓰게 되었다. 그동안 썼던 글을 살펴보니 나름의 일관성이 보이는 듯하다. 우선 오늘의 세계정세가 복합적 위기의 양상을 띠고 있음을 강조하려 했다. 또한, 이에 대응하는 우리의 외교가 당파적 관점에서의 단순 처방을 최대한 피하면서 복합적 대응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도 행간에 녹아있다.
숄츠 독일 총리의 표현을 빌자면, 세계는 시대적 전환(Zeitenwende)에 처해있다. 평화와 번영에 대한 낙관이 자리하던 탈냉전과 세계화의 시대가 끝나고 ‘지정학의 귀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미·중 전략경쟁이 가속화되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도 장기화하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에 몰두하면서 충돌의 위험이 커지고 있는데, 북한과의 대화는 수년째 끊겨있다.
세계화와 상호의존, 그리고 국제협력의 관점에서 바라보던 국제경제도 이제는 안보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른바 ‘경제안보’가 국제정치의 중요한 쟁점 영역으로 부상했다. 특히 반도체와 배터리 등 미래의 국가경쟁력과 국제 세력균형을 좌우할 핵심 산업 분야에서는 정치적 논리에 따라 국제 공급망의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다. 같은 이유에서 인공지능(AI)과 양자컴퓨터 등 첨단 과학기술을 둘러싼 전략경쟁도 치열해졌다.
기후변화와 팬데믹은 국제적 협력이 당위적으로 요청되는 사안이지만, 실제 협력은 느리고 충분치도 않다. 기후전문가들은 지구 온도가 1.5℃ 상승하면 기후 재앙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의견을 모았지만, 이미 1.5℃의 마지노선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인류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부터 간신히 벗어났지만, 이 역시 협력은 충분하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게다가 앞으로 다른 보건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도 상존한다.
실로 복합위기가 진행 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시대적 전환이라고 했지만, 어디로의 전환인지는 오리무중에 가깝다. 그래서 혹자는 초불확실성의 시대라고도 한다. 여러 위기의 징후와 도전적 과제가 동시다발적으로 제기되는 가운데 복합 대응의 필요성이 커졌다.
물론 복합 대응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정치의 논리는 명료성을 선호한다. 정치는 여와 야로 구성되고, 외교를 포함한 정책도 두 개의 대립항 사이에서의 선택의 문제로 제시되곤 한다. 여론도 이미 이러한 이분법적 구성에 익숙하다. 심지어 양자택일의 문제는 도덕적 정의 관념과 결부되어 선악의 문제로까지 인식되기도 한다. 이렇게 프레임 된 문제에서 이것이나 저것이 아닌 중간의 답은 즉각 정치적 오답으로 처리된다.
하지만 명료성만으로 파악되지 않는 다양한 회색지대가 있는 법이다. 오늘의 세계정세는 특히 그러하다. ‘회색의 50가지 음영’이라는 소설의 제목이 있듯이 흑과 백 사이에는 여러 종류의 회색이 있다. 미국과 서방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진영화 된 ‘신냉전’ 대립이 가속화되고 있지만, 양 진영 사이의 제3지대도 여전히 존재한다.
외교정책에 있어서 다양한 현실을 무시한 명료성은 만병통치약 같은 단순 처방에 집착하게 한다. 그러나 이는 복합 처방의 모색을 방해할 뿐이다. 물론 복합의 방법과 포뮬러를 찾는 일에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모든 좋은 것을 다 얻을 수 없으며,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할 것도 있다. 그러므로 국민적 대토론과 의견수렴을 거쳐 목표와 그 우선순위를 정하고, 이를 위한 달성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여 이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확실한 전환의 시대를 살기 위한 조심스럽고 인내심 있는 모색이다.
마상윤 발렌티노(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