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16. 왜 바실리카식 성당이었는가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 로마. 출처=Michal Hajek
바실리카 울피아 내부. 트라이아노 광장, 로마. 출처=Gilbert Gorski
바실리카 울피아 단면 복원도.(오른쪽이 앱스와 다이스) 출처=ARCHI/MAPS
바실리카식 성당의 특징
다시 한 번 더 묻자. 성당은 어떤 건물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예배드리기 위한 공간을 가진 건물, 그것이 성당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공간은 벽과 기둥, 보와 지붕, 행위를 담는 바닥이라는 건축의 형식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그런데 크게 보면 성당의 형식은 두 개뿐이다. 이 두 형식은 아주 오래전 고대 로마 건축 유형에서 받았다. 하나는 ‘영묘(靈廟, 마우솔레움 mausoleum)’를 이어받은 원형의 건물이고, 다른 하나는 직사각형의 홀 건물 유형인 ‘바실리카(basilica)’라는 공공건물이다. ‘영묘’는 순교자 기념 성당에서 직접 전개되었고, 중심형 평면의 정교회 성당으로 발전했다. 이와는 달리 가톨릭교회는 사람이 모인다는 점에서 기능이 같았던 바실리카를 더 중요한 모델로 선택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통치하던 시기의 후반에는 짧은 기간에 수많은 기념비적인 그리스도교 바실리카가 지어졌고, 니케아 공의회 이후 바실리카식 성당은 지중해와 유럽 전역에서 기본 형식이 되어 오늘날에 이어지고 있다.
바실리카식 성당은 어떤 특징을 가졌는가? 입구에 들어오면 나르텍스, 곧 문랑(門廊)이나 입구 안에 있는 홀을 지나 회중석에 들어선다. 긴 축의 끝은 앱스(apse)를 향한다. 앱스란 직사각형 건물의 짧은 변에 돌출된 반원형 제단을 말한다. 가운데는 중랑(中廊)이 있고, 그 옆에는 길게 늘어선 기둥을 따라 측랑(側廊)이 붙어 있다. 중랑의 천장은 높고 측랑의 천장은 그보다 낮다. 그리고 그 지붕 높이의 차이만큼 높은 곳에 창이 있는 고창층이 있다. 이것이 ‘바실리카식’ 성당의 독특한 평면과 공간 형식이다. 이런 바실리카식 성당의 특징은 모두 익히 잘 알고 있다. 서울 명동대성당이나 대구 계산대성당 등이 모두 바실리카식 성당이다. 그렇다면 가톨릭 신자들은 누구나 ‘바실리카’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보편적인 성당 형식이 되었는지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바실리카식 성당은 그리스도교가 처음부터 고안한 건축은 아니었다. 바실리카란 본래 고대 로마제국에서 재판 등에 사용되던 다목적 공공의 홀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성당의 형식으로 변형되면서, 그것이 지니고 있던 독특한 평면과 공간 형식을 ‘바실리카식’이라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바실리카’는 이런 평면과 공간의 특성을 가진 ‘바실리카식’과는 다른 말이다. 따라서 평면이 직사각형이기만 한 성당이 바실리카식 성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바실리카는 고대 그리스부터 있던 건물 유형의 이름이었다. ‘basilica’는 basileus(왕)의 형용사 basilikos에서 나온 말로 ‘왕의 집’이라는 뜻이었다. 바실리카는 기원전 1세기와 2세기부터 로마제국 전역에 지어졌다. 지금은 ‘바실리카식’이란 중랑이 있고 그것에 두 개 이상의 측랑으로 나뉘는 성당의 기본 평면과 공간이라 하지만, 설사 로마제국에 그런 유형이 있다고 해도 드물었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바실리카는 측랑이 없이 홀만 있는 것이었다. 이보다 더 정교한 형태는 측랑이나 갤러리가 중랑을 사방으로 또는 이중으로 에워싸거나 중랑과 나란히 가기도 했다. 로마 바실리카의 고창층은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었다. 또한 로마 바실리카는 긴 변에만 출입구가 있었다고 설명하는 예가 꽤 많으나 그 형식이 딱히 정해진 것은 아니다. 긴 변에서 들어오는 것도 있고 짧은 변에서 들어오는 것도 있으며 아예 긴 변과 짧은 변 모두에 있기도 했다.
간단히 말하면 바실리카의 기능은 커다랗고 넓은 회의장이었다. 그러나 300년 무렵 바실리카는 다른 공공건물의 영향을 받아 엄청나게 활기가 넘쳤고 쉽게 변경할 수 있었는데, 이는 기존의 사원 건축과는 비교가 안 됐다. 용도도 다양했다. ‘포룸 바실리카’라 하여 이웃하는 시장이 연장된 것, 화폐를 교환하기도 하고 의류를 팔고 사는 곳이기도 했다. 상업상 거래도 하고 갤러리처럼 식기를 전시하며 군인 훈련장으로도 쓰였다. 그러는 사이에 사람이 많이 모인 바실리카는 자연스레 소문도 퍼지고 소식을 전해주는 홀이 되었다. 이렇게 로마제국의 도시에는 대부분 광장의 일부로서 중심적 공공건물인 바실리카가 있었다.
바실리카에서 태어난 예배 공간
교회는 왜 바실리카를 선택했을까? 그것은 바실리카 평면은 많은 신자를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종교적 건물은 전통적인 이교도의 사원이었다. 그들의 사원은 숭배하는 상과 보화를 담아두는 곳이었지 그것을 믿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은 관습적으로 중심 통로를 따라 20명이나 30명 정도가 모여 밖에서 희생 제사를 했다. 결국, 그들의 사원은 제사의 배경으로만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 백성 모두가 들어가는 건물이 필요했던 그리스도인의 전례에 이교도 사원 형식은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 더구나 동로마 쪽에서는 4세기 후반, 서로마 쪽에서는 6세기 이전에는 교회는 이교도의 사원이 있었던 자리는 차지하지 않을 정도로 이교도 사원을 멀리했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자,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의 제도를 이용해 조직을 정비하고 확충하며 여러 도시에 주교좌를 두고 포교의 핵으로 삼았다. 그들이 바란 것은 많은 사람이 함께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성당을 짓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이나 되었다. 이 많은 신자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전례 공간. 그 답은 바로 로마제국의 어느 도시에나 있던 공공건물인 바실리카를 변형하여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바실리카를 선택한 것은 넓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바실리카는 제국 전체에서 법정 등의 공적인 홀로 사용되었고 더욱이 황궁의 알현실로도 쓰였으므로 황제의 권력과 관계가 깊은 공권력의 상징 건물이 되었다. 4세기 초에는 바실리카의 목조 지붕 밑에 있는 직사각형 넓은 홀의 작은 변에 앱스를 두고 중심적 요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는 ‘다이스(dais)’라는 높은 단을 두었고, 그곳에 치안 판사 등 고위 관리가 앉아 공무를 수행했다. 그 판사석 가까운 곳에는 황제를 그린 그림이나 조각을 두어 그들의 법적 권한이 황제에서 왔음을 상징했다. 그래서 로마제국에서 자란 사람은 앱스라는 건축 형태가 제국의 법적 권한을 암시하고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바실리카식 성당은 직사각형의 바실리카 평면을 90도 회전하여 작은 변에서 들어오게 했다. 간단한 변형으로 모두에게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전혀 새로운 건축이 생겨났다. 종점인 앱스를 향하는 긴 축이 생겼고, 앱스 안에 거룩하신 하느님께 미사를 드리는 제단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바실리카의 외부는 평평하게 뻗은 벽으로 되어 있었으나 내부는 위엄이 있었다. 대리석 벽에 금박을 입힌 기둥머리와 높은 우물 반자 천장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방들이 격식 있게 배열되었다. 산 조반니 라테라노 대성전을 보라. 격리된 내부 공간에서 성체성사 등의 전례를 거행하는 신비의 종교 그리스도교의 전례 공간은 이렇게 바실리카에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