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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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노숙인들에게 도시락 전하는 청년 모임 ''밀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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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가장 한복판, 가장 낮은 곳에 머무는 서울역 노숙인들에게 매주 도시락을 만들어 전하는 청년들이 있다. 청년 모임 ‘밀알’ 회원들이다. 선뜻 다가서기 어려운 어둡고 낮은 곳으로 향하며 서로에게 사랑의 빛을 비추는 ‘밀알’의 활동을 소개한다.


사랑의 현장 속으로

매주 토요일 오후 서울역에 가면 연두색 조끼를 입은 청년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가방에는 도시락 50개가 담겨 있다. 보통은 불고기, 카레라이스, 참치김치찌개, 짜장밥 등이 도시락을 채운다. 청년들이 장을 보고 직접 만든 밑반찬과 따뜻한 밥을 꾹꾹 눌러 담아 만드는 도시락은 서울역 노숙인들을 위한 양식이다.

이들은 노숙인을 ‘길벗’이라고 부른다. 청년들은 한파가 기승을 부릴 때도, 푹푹 찌는 여름에도 길벗들을 위해 길 위로 향한다. 거친 손에 도시락을 쥐어주며 ‘아픈 곳은 없는지’, ‘필요한 건 없는지’ 함께 머무르며 따뜻한 말들을 건넨다.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싶은 이,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쉬고 싶은 이, 데이트 대신 봉사하는 커플 등 각자 다양한 이유로 청년들은 사랑의 현장으로 모였다.

회장 김형선(스테파노·36·서울 대치동본당)씨는 “밀알 활동을 통해 머리로만 배워온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하게 됐다”며 “가난한 이들과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 건지, 공동선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몸으로 배웠다”고 설명했다.

밀알은 2021년 5월 시작됐다. 이재을 신부(요한 사도·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한국이사회 담당)가 노숙인을 돕기 위해 설립한 사단법인 길벗사랑공동체에서 복음 선교 활동을 하던 윤혜정 수녀(스콜라스티카·살레시오 수녀회)가 공동체 월례미사에 참여한 청년들을 보고 이 신부에게 청년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하며 시작됐다. 서울대학교에서도 사목하던 윤 수녀의 홍보로 청년 5명으로 출발한 밀알. 처음에는 인원이 부족해 한 달에 두 번씩 활동했지만 점차 주위에 알려지고, 참가 청년들의 소개로 어느새 활동 청년은 35명으로 늘어나 매주 팀을 나눠서 진행하고 있다.

밀알은 청년들이 직접 정한 이름이다.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처럼(요한 12,24 참조) 가난한 이웃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사랑의 열매를 맺겠다는 다짐이다.



길 위의 벗들과 함께하는 여정

“김치찌개에 소주 한 잔이 아주 최고지!” 멘토의 도움을 받아 길벗들이 좋아하는 메뉴를 만들고 서울역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는 청년들. 이들의 멘토는 과거 노숙하던 형제들과 쪽방 주민이다. 실패를 거듭하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이가 다시 일어나 자신들과 함께 봉사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청년들은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청년들은 “처음에는 길 위의 느낌이 무서웠다”고 했다. 하지만 동반하는 윤 수녀가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걸 보며 이들도 두려움을 떨치고 길벗들에게 다가섰다. 거친 행동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과 달리 도시락을 받고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는 노숙인들, 전부일지도 모를 꼬깃꼬깃한 5000원 지폐를 쥐어주고 도망치듯 사라지는 이들을 보며 청년들은 내어놓음을 배운다.

박슬지(카타리나·30·서울 주교좌명동본당)씨는 “그분들을 만나보니 나와 다르지 않고 오히려 내 엄마·아빠같은 분들이라고 느꼈다”며 “만남 자체로도 큰 깨달음을 얻는다”고 했다.

수도복을 입은 수녀와 함께 있는 청년들에게 먼저 세례명을 밝히며 다가오는 신자 노숙인들도 있다. 그들과는 길에서 삼삼오오 모여 기도한다. 발등이 다 벗겨진 맨발로 ‘한반도 평화’와 ‘우크라이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면서 시대적 어려움에 관심을 갖는 노숙인들의 모습은 나의 고민에만 짓눌려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울림이 된다.

윤송희(수산나·29·서울 오금동본당)씨는 “훗날 주님의 나라에 갔을 때 그분들이 하느님을 먼저 만나고 계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처음엔 봉사를 받는 입장이 아니라 봉사를 한다는 내 처지에 감사했지만 이제는 어려운 이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도구로 써주신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하다”고 말했다.

청년들은 봉사를 통해 내어주며 채워지는 기쁨을 느끼고, 밥 한 공기조차 귀한 가난한 이웃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소외된 이웃에게 위로를 주려 시작한 봉사에서 자신이 위로 받는 것이 청년들이 봉사를 소중히 여기는 이유다.


복음의 빛으로 확장되는 이웃 사랑

청년들은 길벗들을 만나기 전에 찬양, 복음 말씀에 비춘 생활 나눔을 한다. 내면을 들여다보며 삶 속에서 느낀 하느님의 손길을 고백하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이는 길벗들을 만나기 전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시간이자 그들을 복음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훈련도 된다.

이재을 신부는 “물적 나눔을 넘어 복음의 빛을 받아야 사랑이 확장되기 때문에 말씀 묵상이 중요하다”며 “길벗들을 만나 대화하고 함께 기도할 때 필요한 사랑을 복음 말씀으로 채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청년들의 활동은 세상 속에서 함께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다”고 전했다.

윤혜정 수녀도 “치열한 경쟁에 지치고, 심리적으로도 불안한 청년들이 낮은 곳을 체험하고 그 안에서 퍼지는 사랑을 느끼면 치유가 일어나고 삶이 변한다”고 말했다. 김형선 회장도 봉사 이후 변화됐다. “오랜만에 본 사람들에게 눈빛이 변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방황하던 눈빛이 굳센 눈빛으로 변했다고요.”

천서윤(안토니오·21·서울 목3동본당)씨도 “평소 당연시 여겼던 것을 당연시하지 않게 되고 점점 성장하는 저 자신이 보기 좋아 봉사에 자주 나오게 된다”고 말했다.

청년들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던 지난 3월 25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밀알 모임을 봉헌하고 세상 속에서 사랑의 사도로 파견돼 살아갈 것을 다시 한번 다짐했다. 모임 규모가 커지면서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성모님께 의탁하며 앞으로의 활동을 펼치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가난한 이들 사이로 초대해 주셨어요. 세상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곳에 머물 수 있다는 게 축복 같아요. 우리 모임이 길 위에 머무는 가난한 이웃의 작은 걸음에 함께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둠 속에 계신 길벗들께 반짝이는 빛이 돼주고 싶습니다.”





염지유 기자 gu@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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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3-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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