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미국에서 설립된 메리놀 외방 전교회(총장 랜스 나도 신부, 한국지부장 안구열 아우구스티노 신부, 이하 메리놀회)는 1923년 초대 한국지부장 패트릭 번(Patrick Byrne·방은일 파트리치오) 신부의 입국으로 한국에 진출했다. 그렇게 2023년 한국 진출 100주년 감사미사를 봉헌하기까지 한국 복음화에 투신했다. 한국교회의 비약적 성장에 크게 공헌한 메리놀회의 활동을 알아본다.
평신도 쇄신에 근거한 성공적 북녘 선교
메리놀회의 한국 선교는 평안도에서 시작됐다. 교세가 열악했던 평안도 지역은 당시 사제 5명이 5개 본당과 50여 곳의 공소를 돌보고 있었다.
메리놀회는 1922년 교황청 포교성성(현재 복음화부)으로부터 평안도 지역 포교권을 위임받아 평안도에 교회 기틀을 만드는 데 착수했다. 메리놀회는 1923년부터 평양지목구 설정 준비 책임자 번 신부를 비롯한 여러 사제와 수녀들을 선교사로 파견했다. 그렇게 평안도 교회 성장에 힘쓴 4년 만인 1927년 평안도 일대가 평양지목구로 설정될 만큼 교세는 커졌다.
교세 확장이 이뤄진 건 일제의 한국교회 압박과 공산주의 대두라는 위기 앞에 평신도 참여를 강조하는 메리놀회 선교 정신에서였다. 메리놀회는 ‘가톨릭 운동 연맹’을 조직해 일제 치하의 민족 부흥과 더불어 한국교회의 진흥을 도모했다. 평신도 쇄신을
독려하고 한국에 가톨릭교회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가톨릭 연구 강좌’도 발간했다.
이런 메리놀회의 선교 노력은 제2차 세계전쟁 확전으로 좌절됐다. 미국이 적국으로 간주돼 일제 치하 한국에서 선교사제 전원이 1942년 미국으로 강제송환됐다. 그간 메리놀회의 노력으로 선교사 51명, 본당 21개, 신자 2만6424명에 달하던 평안도 교세 성장도 제동이 걸렸다.
일본이 패전하자 1946년 메리놀회 사제 3명이 입국해 서울 명동성당에 머무르며 평안도 복귀를 준비했으나,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한반도가 분단되며 평안도 선교는 다시 좌절됐다.
교회 성장 기틀을 마련한 남녘 선교
북녘 선교의 문은 닫혔지만, 메리놀회는 남녘 선교라는 새 선교 여정에 나서 청주교구와 인천교구를 성장시키고 한국교회에 확고한 성장 기틀을 마련했다.
1953년 당시 서울대목구장 고(故) 노기남(바오로) 주교는 메리놀회에 충북 지역 사목을 위임했다. 1958년 충청북도 감목대리구가 청주대목구로 독립하고 메리놀회 제임스 파디(James Pardy·파 야고보) 신부가 주교로 서품돼 초대 대목구장으로서 교구의 기틀을 잡았다.
메리놀회는 낙후한 산골에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충북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농민들 사이에 교회를 세웠다. 충북 각지 발전 가능성이 있는 곳에 복음의 전초기지인 본당들을 마련했다. 증평, 옥천, 보은 일대에 의원을 개원해 농민들에게 의료 지원을 하고 미국 주교회의 산하 가톨릭구제회의 지원으로 충북 일대 빈민 구제에도 나섰다.
메리놀회는 충북의 본당들에 신용협동조합을 세워 가난한 사람들이 대출을 받아 소규모 사업을 시작할 디딤돌을 마련했다.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우 사육과 양돈 사업을 통한 농촌 소득 증대 운동을 펼쳐 경제적 자립 기회도 제공했다.
메리놀회의 노력으로 충북 지역 교회가 활기를 띠자 노 주교는 1958년 인천 일대 지역 사목도 메리놀회에 맡겼다. 교황청은 1961년 인천 감목대리구를 대목구로 승격시키고, 메리놀회 나길모(William John McNaughton) 신부를 주교로 서품해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했다.
전쟁 피난민이 넘치던 인천에서도 메리놀회는 가장 낮은 자들 안에 교세를 늘렸다. 강화도에 정착한 피난민 300여 세대에게 갯벌을 개간한 농지를 분배했고, 가톨릭구제회로부터 제공받은 구호 식량으로 굶주린 이들을 먹였다. 강화도 일대에 ‘그리스도왕 의원’ 등을 세워 주민들에게 의료 혜택도 제공했다.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조직해 빈곤한 노동자들의 권익 수호를 위해서도 활동했다.
메리놀회의 이런 노력으로 청주교구는 2022년 기준 주민 대비 신자 비율 11.6, 82개 본당에 교구사제 약 200명으로, 신자 비율이 가장 높은 한국 농촌 교구 중 하나로 성장했다. 인천교구는 신자 52만여 명으로 한국교회에서 3번째로 큰 교구로 성장했다.
한국교회 자립을 위한 성소 양성
메리놀회는 한국교회의 자립을 선교의 본질로 여겼기에 지속적으로 한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를 양성했다. 메리놀회는 평양에서 한국 최초의 방인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를 설립하고 한국인 입회자를 받는 데 주력했다. 한국교회의 동반자로서 사제를 양성하고 사제 성소도 적극 개발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는 오늘날 전국에서 가장 큰 수녀회 중 하나로 거듭났다.
메리놀회는 지역사회에 스스로 복음을 전파할 평신도 성소도 키웠다. 본당마다 가톨릭청년회를 활성화하고 레지오마리애를 사목에 적극 활용하는 등 평신도 교리교육에도 정성을 쏟았다.
사회 현장에 뛰어드는 사목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메리놀회는 보편교회 쇄신에 따라 열악한 사회 현장에 뛰어드는 특수사목을 지향했다. 1980년대 메리놀회는 메리놀수녀회와 함께 경기도 성남에서 노동자·빈민들이 함께하는 기초공동체 활동을 시작했다. 1987년 서울 고속버스터미널본당, 1991년 가락시장준분당 등 준본당 사목도 착수했다. 일반 사목자들이 힘쓰기 어려운 특수한 사목 영역에도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함을 보여주는 행보였다.
설립 정신인 아시아 선교를 향해
한국 진출 100년간 메리놀회는 평신도 쇄신에 근거해 평안도서부터 교회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고, 가난한 자들을 섬기고 사회 참여적 태도로 한국교회의 자립을 돕고 교세를 크게 성장시켰다. 이처럼 한국에서 거둔 사목·선교 성과를 바탕으로 메리놀회는 한국을 넘어 본래 취지인 아시아 선교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선교사로서 60여 년간 한국과 함께한 메리놀회 함제도(Gerard E. Hammond) 신부는 남녘 교회 복음화의 결실을 거둔 지난 세월을 보내며 “분단으로 좌절된 메리놀회의 북녘 선교가 민족 화해로 부디 재개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국과 일생 함께한 선교사들 모두, 고향이자 첫 번째 선교지 평양으로 돌아가는 꿈을 잊지 않았다”는 함 신부의 말처럼, 메리놀회는 다음 100년은 북녘 교회를 되찾고 중국과 아시아 전역에 복음의 밀알을 심는 선교 여정을 준비하고 있다.
박주헌 기자 ogoy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