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중에 이렇게 말을 하고 교우들의 표정을 보니, 마치 영혼이 잠시 외출을 한 것 같은 얼굴들이다. 나는 바로 그 원인을 파악해 말을 바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베트남인도 사랑하시고, 캄보디아인도 사랑하시고요, 당연히 저 같은 한국인도 사랑하시죠. 가난한 사람도 사랑하시고, 돈이 많은 사람도 사랑하세요. 이런 게 바로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랑을 늘 모두에게 주십니다.”
내가 맡고 있는 본당 교우들은 모두 베트남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분들 대부분은 크메르어(캄보디아어)가 서툰 편이다. 그날도 ‘조건 없는 사랑’이나 ‘예외 없는 사랑’에 해당하는 크메르어 단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조금 더 쉬운 방식으로 풀어서 강론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흔히 쓰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단어들도 못 알아듣는 교우들을 볼 때마다 답답한 마음도 들고, 한편으로는 교우들의 입장에서 더 생각하지 못한 점을 반성하기도 한다.
마을과 삶의 중심은 성당
캄보디아 천주교회의 전체 신자 중 70가 베트남 사람들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베트남 신자들은 캄보디아 국적은 물론, 베트남 국적도 없는,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베트남전과 공산화를 피해 캄보디아로 넘어왔고, 오늘날까지도 캄보디아와 베트남 정부 모두가 이들에 대한 공식적인 책임을 지려 하지 않고 있다.
이곳에 사는 대다수의 베트남 사람들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수상가옥과 강변의 불법 점유지역을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는 정도)만 겨우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토지 구입이나 사업자 등록, 자동차나 오토바이 등록 등의 일들도 합법적으로 할 수 없고,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린이들이라 하더라도 국적 취득의 기회나 공교육의 혜택을 받을 방법이 많지 않다.
그럼에도 캄보디아에 있는 베트남 교우들은 지난 수십 년간 굳건히 버텨왔다. 베트남인 특유의 성실함과 영리함,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민족에 대한 자긍심과 동지애로, 그들에게 주어진 불리한 조건들을 극복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교회가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쩜빠(Chompa) 마을’은 프놈펜 시내에서 12㎞ 정도 떨어진 메콩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주민들이 모두 신자인 교우촌이며, 캄보디아에서 가장 크고 역사가 깊은 교우촌이기도 하다. 마을 한가운데에 위치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쩜빠성당’은 미사와 성사가 이뤄지는 성당의 역할만 하지 않는다. 마을의 중요한 대소사를 정하는 의결기구의 역할도 하고, 주민들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는 법원과도 같은 역할도 한다. 또 베트남 사람들이 이곳에서 어렵게 느낄 수 있는 사회ㆍ행정적 서비스까지 돕고 있다.
본당의 이런 역할들은 마을 형성 초기부터 시작됐다. 당시 법적으로 토지를 구입할 수 없었던 교우들을 위해 본당은 충분한 넓이의 땅을 구입하였고, 그 덕분에 많은 가족이 수상가옥에서 벗어나 땅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또 어린이들을 공립학교에 보내기 위해 캄보디아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계속 도왔고, 성당 내부에는 아이들이 베트남어와 베트남 문화를 배울 수 있도록 별도의 베트남 학교를 설립해 운영해왔다.
처음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곳도 성당이고, 처음 상수도가 들어온 곳 역시 성당이며, 인터넷 회선 역시 성당이 처음으로 들여왔다. 그렇게 성당은 마을의 변화를 계속해서 이끌어왔고, 베트남 사람들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동시에 캄보디아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게끔 도와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교우들의 삶의 중심에 성당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굳건한 베트남인들의 신앙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베트남 사람들의 신앙심은 정말 대단하다. 우기가 한창이던 어느 날, 엄청난 폭우로 성당은 물론, 마을 전체가 다 물에 잠겼었다. 분명 자신들의 집도 절반 이상이 잠긴 상황이었는데, “주님의 집이 먼저”라며 많은 사람들이 성당으로 달려와 물을 퍼내고 집기들을 옮겨줬다. 이런 모습을 볼 때면 너무나도 고맙고 감동적이다.
해마다 섣달 그믐 밤이 되면 또 다른 감동이 몰려온다. 밤 11시 50분경, 대부분 교우들은 사제관 앞 마을광장에 모인다. 그리고 자정, 새해로 넘어가는 그 순간 다 함께 주모경을 바친 뒤 사제의 강복을 받기 위해 고개를 숙인다. 수백 명의 신자가 모여 새로운 한 해를 기도와 강복으로 시작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흐르기도 한다.
캄보디아의 베트남인 마을은 사목자 입장에서는 정말 살기 좋은 곳이다. 열심한 교우들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즐겁고 행복하다. 게다가 교우들께서는 그저 내가 사제라는 이유로 많이 좋아해 주고, 사랑해 준다. 마을 광장 앞 사제관 사무실에는 늘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저 “시장에서 옥수수를 넉넉하게 샀다”며 나눠주러 온 자매님들과 낚시가 잘 되어 물고기를 나눠주려고 오는 형제님들이 주요 손님들이다. 어린이들은 사무실 앞을 오가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큰소리로 인사를 하고, 청소년들은 그냥 놀러 와서 커피 한잔 함께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간다. 그렇게 함께하는 시간 속에 정이 생겼고, 나 또한 우리 교우들을 더욱 사랑하게 됐다.
베트남 신자들은 2순위?
모든 것이 수월한 것은 아니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언어적인 어려움도 물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긴 시간 교우들과 함께하며 마음으로 통하는 무언가로 극복하고 있다. 특히 요즘 청소년과 청년들은 대체로 크메르어를 하기에 괜찮다고 본다.
그보다 요즘 나는 캄보디아 교회의 선교 정책에서 오는 어려움을 많이 느끼고 있다. 정책상 모든 사목적인 혜택의 우선 순위는 캄보디아인 공동체에 있기 때문이다. 예산 책정부터 교회 운영에 대한 여러 지침들까지, 베트남 교우들은 항상 2순위로 밀려있다. 내가 맡고 있는 세 곳의 성당들도 모두 교구로부터 직원들의 급여를 제외한 본당 운영 예산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순수하게 교우들의 봉헌금으로 겨우 운영만 가능한 상태인데, 결코 교우들이 재정적으로 넉넉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주님의 집’을 우선으로 두는 마음으로, 없는 살림에 열심히 봉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 고맙고, 더 미안하다. 여전히 자립이 어려운 캄보디아인 공동체에 우선적인 지원이 가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이번에도 어렵겠네요”라는 말을 몇 년째 듣는 본당 신부의 심경은 참담하기만 하다.
그래도 그동안 한국에 계신 여러 은인 분들의 도움으로 본당의 유지와 보수, 그리고 조금 더 나은 환경으로 바꿔가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먼 곳에 있는 그리스도인 가족들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의 나눔을 실천해주시는 고향의 형제자매님들이 계심에 감사드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