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열린 주교회의 청소년사목위원회 학술 심포지엄에서 가장 많이 논의된 이야기는 청소년을 대상이 아닌, 주체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톨릭 사도로 활동할 수 있고 그럴 자격이 충분한 청소년들의 모습을 과거 성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청소년 주일을 맞아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고백한 청소년 성인들과 복자 중 활동 연도를 파악할 수 있는 5인에 대해 알아본다.
“그리스도 상처가 더 마음 아프다” 성녀 세라피나
“나의 상처보다 그리스도 상처가 더 마음 아프다.” 15살에 하느님 품에 안긴 성녀 세라피나(Seraphina, 1238~1253)는 중병에 걸려서도 불평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산 지미냐노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를 여읜 후 자신도 중병에 걸려 얼굴이 기형적으로 변하고 몸도 움직이지 못했다.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 고아와 다름없어진 그는 성 대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을 특히 공경했다. 고통을 참을 수 있는 인내를 달라고 그녀는 청했고, 눈을 감기 8일 전 성 대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의 발현을 보았다. 교황은 그녀에게 “나의 축일에 하느님께서 너에게 안식을 주시리라”라고 말했고, 세라피나는 1253년 3월 12일 선종했다.
어릴 때 아름다운 모습으로 귀여움을 받고, 적은 음식조차 타인에게 선하게 나눠준 세라피나는 낮에는 가사를 했고, 밤에는 기도에 전념했다. 그녀가 잠든 무덤에는 하얀 제비꽃들이 자랐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높은 성덕을 증명하는 것으로 본다. 지금도 산 지미냐노에서는 하얀 제비꽃을 ‘산타 피나’(성녀 피나)라 부르며 나눠 갖는다고 한다.
“천 번 죽어도 천주님 배반할 수 없다” 복자 이봉금
“천 번 죽어도 그렇게는 못 하겠어요.” 124위 복자 중 최연소자로 추정되는 이봉금(아나스타시아, 1827?~1839)은 천주를 배반하면 살려 주겠다는 말에도 이를 거부했다. “오늘 천주님을 배반하고 욕을 하라고 하시어도 그렇게 할 수 없어요”라면서다.
어머니인 복자 김조이(아나스타시아)에게 일찍부터 신앙을 물려받은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열 살 무렵 아침·저녁 기도 등을 배웠다. 선교사는 그녀가 아직 어린 나이지만 신심이 뜨거워 특별히 그녀의 영성체를 허락했다. 기해박해 당시 여러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어머니가 옥중에서 순교하는 장면까지 목격했지만, 이봉금은 신심을 버리지 않았다. 관장은 한밤중에 이봉금을 옥에서 교수하라고 명했고, 1839년 12월 5일에서 6일 밤 사이, 이봉금은 12세를 넘기지 못한 나이로 추정되는 때에 하느님 품에 안겼다.
“신심은 우리가 숨을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성 도미니코 사비오
성 도미니코 사비오(Dominic Savio, 1842~1857)는 기도 정신이 여느 큰 성인 못지않았다. 성인이 되려는 열망으로 여러 특이한 고행을 원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사제를 꿈꿨다. 5살 때부터 매일 미사에서 복사를 섰고, 7살 때 예외적으로 첫영성체를 했다. 성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 신부는 그의 영혼 속 충만한 은총에 감명받았고, 그의 지도로 도미니코 사비오는 고행보다는 일상 속 하는 일 하나하나에 충실하며 성화했다.
친구들과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회’를 조직해 성덕을 쌓은 도미니코 사비오는 학생들이 돌을 들고 싸울 때 십자가를 들고 그들 사이에 끼어들며 “그 돌을 먼저 나에게 던져라”하고 말했다. 요한 보스코가 과하게 고행에 몰두하는 그를 말리자, 도미니코 사비오는 “신심은 우리가 숨을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워야 합니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아침부터 몇 시간 동안 기도하며 그 시간 동안 ‘기분 전환’했던 소년은 건강이 나빠져 눈감기 전까지도 이처럼 밝혔다. “하느님, 당신께 영원한 찬미를 드리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그에 대해 「로마 순교록」에서는 “달콤하고 행복한 영혼을 지닌 어린 시절부터, 아직 청소년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리스도교의 완덕의 길을 걸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쯤으로 배교할 줄 아세요?” 성 유대철
문초받기를 1회, 고문 14회, 태형 600여 대와 치도곤 45대 이상…. 이 같은 아픔에도 성 유대철(베드로, 1826~1839)은 항상 기쁜 얼굴로 지냈다. 가련한 몸에 옥 안에서 노끈에 목이 매여 죽을 때도 그의 나이 고작 14살이었다.
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사방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용감했다. 박해가 일어나자 마음에는 순교하고자 하는 욕망이 일었고, 옥에 갇힌 아버지와 여러 신자를 보며 1839년 7월경 관헌들에게 그는 신자라고 자수했다.
재판관은 그에게 배교한다는 말을 들으려 갖은 방법을 썼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한 포졸이 담뱃대 통으로 그의 허벅지를 박아 살점을 떼어 내면서 “이래도 천주교를 버리지 않겠느냐?”라고 물을 때도 그는 확언했다. “그러면요, 이쯤으로 배교할 줄 아세요?” 그 후 포졸들이 붉게 달군 숯 덩어리를 들며 입을 벌리라고 했을 때도 그는 “예”하고 입을 벌렸고, 그에 놀라 포졸들은 물러났다. 이처럼 용맹했던 소년은 1925년 7월 5일 시복, 1984년 5월 6일 시성됐다.
“그 모든 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성 펠라지오
“그 모든 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 펠라지오(Pelagius, 912년경~925·6)는 배교하고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면 모든 것을 주겠다는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관리들은 펠라지오에게 돈과 좋은 옷을 주고 훌륭한 말을 타게 해 주겠다고 했지만, 펠라지오는 “나는 그리스도인이었고,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인으로 남을 것입니다”라고 할 뿐이었다.
그가 10살쯤 인질로 잡혀 감옥에서 3년을 지낸 그 시절은 압드 알 라흐만 3세가 스페인을 통치하던 때였다. 코르도바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을 지킨 펠라지오는 사형 선고를 받고 팔이 잘리는 등 혹독한 고문을 받고 순교했고, 코르도바 그리스도인들은 소년의 팔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보존했다. 유해는 967년 레온의 한 수도원에 모셔졌다가, 984~999년 즈음 스페인 서북부 오비에도의 성 펠라기우스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 옮겨져 안장됐다.
이소영 기자 lsy@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