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가 주도하는 첫 ‘생명대행진’이 5월 27일 대구에서 열렸다. 그동안 서울에서 열렸던 생명대행진은 프로라이프 중심의 생명대행진 조직위원회가 주최하고 가톨릭교회가 참여하는 형식이었다. 이 대회와 별도로 주교회의 가정과생명위원회(위원장 이성효 리노 주교)는 가톨릭교회가 주최하는 생명대행진을 각 교구별로 순회하며 열어, 생명운동 저변을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첫 포문을 연 곳은 대구대교구였다. ‘생명을 주는 가정’을 주제로 대구대교구 가정복음화국(국장 박상용 요한 사도 신부)이 주관한 이날 행사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신자들이 거리를 걸으며 “태아도 생명”이라고 외쳤다.
한 걸음 더
이날 행사에는 대구대교구 이외에도 전주, 수원, 대전, 마산 등 전국 교구 신자들과 전주교구 가정사목국장 이금재(마르코) 신부, 대전교구 가정사목부 전담 이영일(야고보) 신부 등 사제들이 함께했다. 주최 측인 주교회의 가정과생명위원회에서도 총무 진효준(요셉) 신부와 평신도 위원들, 생명운동본부 총무 유재걸(프란치스코) 신부가 참석했다. 또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자매회 신상현(야고보) 수사 등 수도자들, 한국가톨릭여성단체협의회 회원들이 동참했다.
참가자들은 오후 1시 대구 수성성당(주임 이상택 리노 신부)에서 인사를 나눈 뒤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생명 수호는 선택 아닌 의무입니다’, ‘우리 모두 태아였다’ 등이 적힌 손팻말과 현수막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 참가자들은 주교좌범어대성당(주임 최환욱 베다 신부)까지 1.5㎞의 길지 않은 거리를 침묵 속에 걸으며 시민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대구대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는 “오늘날 여러 가지 생명에 반하는 문화가 확산돼 있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생명 문화를 퍼뜨리는 사도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성효 주교는 1973년 미국에서 여성의 임신중절 권리를 인정하는 ‘로 vs 웨이드’ 판결, 한국에서는 모자보건법을 제정하면서 낙태가 합법화됐다고 설명하며 “그러나 대한민국은 현재 낙태 1위 공화국이 되고 말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이 주교는 미국에서 이듬해인 1974년부터 매년 생명대행진이 열리고 있는 것을 언급하며 “우리도 생명대행진을 통해 생명 존중 의식을 대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야 한다”고 당부했다.
생각의 전환
주교좌범어대성당에서 마련된 기조강연과 토크콘서트는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기회였다. 노래를 맡은 생활성가 밴드 ‘하늘바라기’는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워줬다.
기조강연을 맡은 대구가톨릭대 교수 송영민(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우주적 관점에서 생명을 바라볼 수 있도록 초대했다. 놀라운 생명 현상에 경이로움과 경외감을 느낄 때 우리는 생명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진정 깨달을 수 있다고 송 신부는 강조했다.
송 신부는 “생각의 폭을 넓혀 우주적으로 생각하고,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바라보면 누가 이 모든 생명을 주관했는지 알 수 있다”며 “생명은 누군가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토크콘서트에서는 대구가톨릭평화방송 김현정(마리아)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노년과 장년, 청년, 청소년 대표가 패널로 나서 세대별 의식에 따른 솔직한 의견을 나눴다.
청년 대표 서정아(요안나)씨는 “주변에 경제적인 이유나 개인의 성취와 행복에 좀 더 무게를 두고 비혼을 선택하거나 자녀를 낳지 않는 가정이 많아지고 있다”며 함께 고민해볼 것을 제안했다. 노년 대표 배한동(요한)씨는 사회가 노년들을 효용 가치에 따라 평가하는 것에 함부로 취급받는 느낌을 받는다며 “이제는 가정에서도 노인의 서열은 다섯 번째 이하로 내려갔다고 한다”고 한탄했다.
패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넘어 사회나 교회 안에서 생명 문화를 꽃피울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부터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교육’의 중요성을 공통적으로 피력했다. 장년 대표 김태우(대건 안드레아)·박정향(엘리사벳)씨 부부는 “가족 단위의 생명 공부가 필요하다”며 “특히 부부가 결혼 후 어떻게 성가정을 이룰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교회의 교육 인프라를 잘 활용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청소년 대표 전소현(임마쿨라타)양은 ‘죽겠다’고 쉽게 내뱉는 언어부터 개선됐으면 좋겠다면서 “이런 말로 인해 우리 마음 안에 생명의 문화가 조금씩 없어지는 건 아닌가 걱정된다”고 밝혔다.
생명 문화 건설을 위해
가정과 생명을 위한 미사는 오후 4시 주교좌범어대성당에서 이성효 주교 주례, 조환길 대주교와 참가 사제단 공동집전으로 봉헌됐다.
이 주교는 “대구 생명대행진이 태아 생명권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여론의 전환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며 조속히 낙태법 입법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주교는 또 “우리가 걷는 이 작은 한 걸음이 시민들에게 올바른 메시지를 전달하고, 생명 문화를 건설하는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주교회의 가정과생명위원회는 내년 5월 25일 대전교구에서 2024년 생명대행진과 가정과 생명을 위한 미사를 이어갈 계획이다.
한편, 신상현 수사와 예수의 꽃동네 형제자매들은 “헌법재판소가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손을 들어준 것은 절대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대립적 가치로 여긴 큰 잘못”이라며 “조속히 생명 존중 방안을 제정해 주실 것을 촉구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호소문을 낭독했다.
우세민 기자 semin@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