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Josemaria Escriva) 신부는 ‘하느님의 일’을 뜻하는 ‘오푸스 데이(Opus Dei)’ 성직 자치단 설립자다. 오푸스 데이는 평신도와 성직자 모두를 성화로 이끄는 주님의 뜻에 따라, 일상의 삶에서 성덕을 발견하도록 이끌고 있다. 에스크리바 신부는 200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으며, 당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에스크리바 신부를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증거자 중 한 명’이라고 칭송했다. 신자들이 일상의 삶에서 성덕을 쌓는 일의 중요성을 널리 알린 에스크리바 신부의 삶을 알아본다.
항상 주님의 뜻을 살폈던 호세마리아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신부는 1902년 1월 9일 스페인 바르바스트로에서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호세 에스크리바와 어머니 마리아 돌로레스 알바스는 독실한 신자였다. 에스크리바의 부모는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항상 기도하고 성모 신심이 투철했다. 부부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신앙과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실천했다.
이러한 부모의 신앙 교육 안에서 에스크리바 신부는 밝고 명랑하며 올곧은 아이로 성장했다. 그는 부모와 거리낌 없이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했으며, 부모는 애정과 신중함을 담아 자녀들의 질문에 답했다. 하지만 1910년부터 3년 사이에 에스크리바 신부는 세 명의 동생을 잃고, 1914년에는 아버지의 사업이 파산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에스크리바 신부는 외향적이고 쾌활한 성격을 잃지 않았다.
1917년 겨울, 에스크리바 신부는 그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경험을 했다. 아버지가 직장을 구하기 위해 이사한 로그로노에서 살던 중이었는데, 그해 주님 성탄 대축일에 로그로노에 많은 눈이 내렸다. 에스크리바 신부는 눈밭에 발자국을 봤는데, 한 가르멜 수도자가 남긴 것이었다. 당시 에스크리바 신부는 “이웃들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많은 희생을 하고 있는데, 나는 어떤가”라고 생각했다. 이후 그는 주님의 뜻을 더욱 잘 실행하기 위해서 사제가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중등교육을 마친 에스크리바 신부는 로그로노 신학교에서 사제 양성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1920년에는 사라고사 신학교로 옮겨 사제 수업을 이어갔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아버지의 제안과 신학교 학교장의 허락을 받아 사라고사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당시 에스크리바 신부는 성체조배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의 영적인 삶의 근원은 바로 성체였다. 그는 매일 사라고사의 필라 성모 대성당을 찾아 성모께 주님의 뜻을 알려달라고 청원했다.
그는 1925년 3월 28일 디아스 고마라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페르디게라라는 작은 시골마을 본당의 보좌신부로 사목을 시작했다. 1927년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에스크리바 신부는 교구장의 허락을 받고 마드리드로 이주했다. 그는 학위를 준비하면서도 사목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고, 학생과 예술가, 노동자, 학자, 동료 사제들과 함께 했다. 특히 그는 마드리드 외곽의 아이들과 환자, 빈민을 돌봤다. 동시에 그는 1924년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남은 가족을 돌보기 위해 학교에서 법을 가르쳤다.
오푸스 데이 설립
에스크리바 신부는 피정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1928년 10월 2일 마드리드에서 피정을 하던 중, ‘오푸스 데이’(Opus Dei)를 설립했다. ‘오푸스 데이’는 라틴어로 ‘하느님의 일’이라는 뜻이다. 오푸스 데이는 사회 모든 계층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성화를 통해 사랑을 실천하고 완덕에 이르도록 돕는 단체다. 에스크리바 신부는 하느님께서 오푸스 데이 설립을 이끌었음을 확신하며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푸스 데이는 에스크리바 신부를 알고 있던 젊은이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스페인 내전(1936~1939)으로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에스크리바 신부는 북부 부르고스로 피신했다. 내전이 끝난 후 에스크리바 신부는 피정을 지도하며 전국을 돌아다녔고, 동시에 오푸스 데이도 스페인의 여러 도시로 전파됐다.
1943년 에스크리바 신부는 오푸스 데이와 긴밀하게 일치해 있는 성 십자가 사제회를 창설했다. 성 십자가 사제회의 창설을 통해 오푸스 데이 회원들은 사제품을 받을 수 있게 됐으며, 교구 사제들은 교구장 주교에게 속한 신분으로 성직을 수행하면서 오푸스 데이의 영성과 수련 방법에 따라 성화를 꾀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1946년 보편교회로부터 오푸스 데이를 승인받기 위해 교황청과 가까운 로마로 거처를 옮겼다. 1950년 6월 16일 비오 12세 교황은 오푸스 데이를 공인했고, 이후 오푸스 데이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 현재 8만5000여 명의 남녀 회원이 활동하고 있으며, 이중 98가 평신도다.
일상에서의 성덕을
이후 에스크리바 신부는 유럽과 남아메리카를 돌며 오푸스 데이의 영성을 가르쳤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 성사, 그리스도인의 헌신, 일과 일상 생활에서의 성화를 강조했다. 그는 일상 생활을 통해 성덕을 이룰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모든 종류의 일이 기도가 될 수 있고, 또 실제로 기도가 되고 사도직으로 이어진다고 믿었다. 그는 「길」(The Way, 1939)을 비롯해 「영적 성찰」(1934), 「거룩한 묵주의 기도」 등의 저서를 통해 오푸스 데이의 영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에스크리바 신부는 1975년 6월 26일 선종했고, 당시 전 세계 주교 1/3이 넘는 1300여 명을 포함해 세계 각지에서 그의 시복시성을 청원했고, 1981년 공식적인 시복시성 절차가 시작됐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2년 그를 시복했고, 2002년 10월 6일 성인품에 올렸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시복식 강론에서 “에스크리바 신부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적절하고 시급하다”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일상 생활의 중심이자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새 성인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의 발자취를 따라 인종과 사회적 계급이나 나이를 떠나 우리 모두가 성덕으로 불림을 받았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실천하자”면서 “성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주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며, 겸손과 봉사라는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