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획은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와 가톨릭신문이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 주교들이 실천한 시노달리타스
가톨릭교회는 최근 몇 년 동안 시노달리타스를 화두처럼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끄는 교회 쇄신의 이 여정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남겨 준 혁명적 선물이다. 이 공의회는 교회가 누구인지 인격적으로 묻게 해 주었고, 교회란 교계제도가 아니라 모든 하느님 백성임을 일깨워 주었다. 교회의 중앙집권화를 완화하고 지역교회에 자율적 책임을 강화하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회론과 사목 전망 또한 교부 전통과 맞닿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원천에서 길어낸 것이다.
한국천주교회에서도 다양한 연구와 실천을 이어가고 있지만, 시노달리타스는 평신도의 능동적 참여를 독려하고 소통을 강화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지난 5월에 한국을 방문한 토마시 할리크 몬시뇰이 공동합의정신(시노달리타스)을 향해 던진 돌직구는 묵직하다. “장상들, 특히 주교들이 자기 역할을 왕정시대로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교회 안에서 대화의 중재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그리스도교의 오후」 137쪽) 시노달리타스에 가장 앞장서야 하고 스스로 변화해야 할 주체는 바로 주교라는 것이다. 자기 교구에 대한 배타적 권한을 강조하면서 주교회의를 단순 협의체로 평가절하하는 군주적 주교직에서 스스로 벗어날 때 시노달리타스는 진정성을 지닐 수 있다는 말이다.
로마의 주교는 지역교회 주교들과 형제적 친교와 보편적 일치를 이루고, 개별 주교들은 교구의 철옹성을 허물고 이웃 주교들과 연대하여 세상과 사회의 시급한 사목 현실에 응답하기를 바랐던, 이른바 주교단의 단체성(collegialitas)과 공동합의정신(synodalitas)을 향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간절한 염원이 지금 하느님 백성 전체의 시노달리타스 여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교부 시대의 교회 생활은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목숨이 위태로운 박해 시대에도 주교는 하느님 백성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다가 앞장서서 순교했다. 이단 논쟁과 교회 분열의 격동기에도 주교는 자신의 공동체를 참된 신앙 안에 지켜내기 위해 추방과 유배의 위협을 무릅썼다. 국가 권력의 횡포에 맞서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지키고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일은 주교의 특권이었다. 교부들이 동방과 서방의 서로 다른 문화와 지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먼 거리를 직접 오가거나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회 문제를 협의하고 사목적 연대를 이루었던 아름다운 전통은 오늘날에도 깊은 영감을 준다.
■ 흔들리는 시노달리타스
초기 교부 시대에 신앙 문제를 제외한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는 부활절 거행 날짜 문제였다. 예컨대 동양의 설 전통과 서양식 양력설을 통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일이었다. 소아시아는 요한 전통에 따라 평일이라도 상관없이 히브리인의 음력인 니산 달 14일(춘분 다음 만월이 되는 날)에 부활절을 거행했지만, 로마에서는 니산 달 14일이 지난 주일에 부활절을 지냈다.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아시아 전역의 수장이던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푸스(재위 155/160년경)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로마까지 가서 그곳 주교 아니케투스(재위 154~165년)를 만났다. 그들은 의견 일치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서로의 전통을 존중하고 교회의 친교와 평화를 유지했으며 공동으로 성찬례를 집전한 뒤 평화롭게 헤어졌다.
그러나 베드로를 이어 열세 번째 로마 주교가 된 성 빅토르 1세(재위 189~199년경)는 달랐다. 부활절 거행 날짜를 두고 서방의 주일 관행을 일방적으로 강요함으로써 보편교회의 친교와 일치를 심각한 위기에 빠뜨렸다. 지역별로 주교회의를 열어 고유한 의견을 보편 교회와 공유했지만, 빅토르는 소아시아 모든 교구와 인근 교회들을 제명했으며 단죄 서간을 발송하여 그 지역 신자들을 파문했다. 소아시아는 반발하며 요한 전통을 지켰다. 소아시아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에서 더 이상 환대받지 못했고 성찬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 교부 시대 가장 빛나는 시노달리타스 전통
초기교회를 강타한 극단적 대립과 갈등 상황에서 선배 주교들인 폴리카르푸스와 아니케투스의 공동합의정신(시노달리타스)을 상기시키면서 교회 일치와 평화를 당부하며 중재한 대표적 인물은 리옹의 주교 이레네우스(재위 200년경)였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라 불린 이레네우스는 로마의 주교 빅토르 1세에게 개인 편지를 보내 주교단의 일치를 깨지 말라고 권고한다. 그리고 갈리아 지방 주교들의 뜻을 모아 중재 서간도 보낸다. 서방교회(프랑스 리옹!)의 주교였지만 로마를 편들어 서방 관행을 밀어붙이지 않고 오히려 아시아교회의 고유한 삶과 현실을 깊이 헤아리고 배려한 이레네우스의 이 편지 단편이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5,24,16-17)에 보존되어 있다.
“아니케투스가 로마 주교로 다스릴 때, 복되신 폴리카르푸스께서 로마에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문제에 사소한 의견 차이가 있었지만 곧바로 평화를 찾았으며, 이 주제로 서로 논쟁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니케투스는 폴리카르푸스에게 그 부활절 관행을 지키지 말라고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폴리카르푸스는 우리 주님의 제자 요한, 그리고 당신이 함께 살았던 다른 사도들과 더불어 늘 그 관행을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폴리카르푸스도 아니케투스에게 자기 관습을 지키라고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니케투스는 전임 주교들의 관습을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그들은 서로 친교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아니케투스는 폴리카르푸스를 매우 존경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성찬례를 주례하도록 양보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평화롭게 헤어졌고, 니산 달 14일을 지키는 사람이든 지키지 않는 사람이든 모든 교회가 평화를 누렸습니다.”
빅토로 1세의 단죄와 파문이 어떻게 거두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으로 교회의 평화를 위해 동분서주한 이레네우스의 헌신적 노력 덕분에 극단적 분열을 피할 수 있었다. 서로의 차이와 고유한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교회 일치는 가능하다는 사실을 실천적 본보기로 보여준 폴리카르푸스와 아니케투스의 공동합의정신뿐 아니라, 존중과 배려로 교회의 평화와 일치를 일구어낸 이레네우스의 본보기는 교부 시대의 가장 빛나는 시노달리타스 전통이다. 지난 2022년 1월 21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동방과 서방의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신학적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된” 이레네우스에게 ‘일치의 박사’(doctor unitatis)라는 공적 칭호를 헌정한 것은 오늘날 시노달리타스 여정에서 매우 시의적절한 일이었다. 이 시대의 주교들도 분단되고 양극화된 이 세상에서 부디 이레네우스 교부처럼 평화와 일치의 중재자가 되어달라는 연로한 교황의 애틋한 호소처럼 들린다.
최원오(빈첸시오)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